강해, 제32과
라반의 집으로
김태정 목사창세기 29:1-14약 23분 분량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29:13)
<야곱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열 개의 에피소드가 대칭 구조 내지는 동심원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서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참고: <야곱 이야기: 서막>
이 가운데서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두 주인공 ‘야곱’과 ‘라반’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어, 흔히 <야곱-라반 순환>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본문은 <야곱 이야기> 전체적으로는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되지만, ‘야곱’과 ‘라반’의 첫 만남이라는 점에서 <야곱-라반 순환>의 서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 있는 부모의 집을 떠나, ‘벧엘’ 즉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마침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당도하게 됩니다. 이 내용이 지니는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라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라반’을 잘 알고 있는 목동들을 들에서 만났고, 그리고 조금 후 그들을 통해서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난 바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만남들이 “벧엘의 만남”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벧엘’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들 질문들이 본문에 대한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전체 <야곱 이야기> 중에서(25-35장) ‘야곱’과 ‘라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29-35장은 <야곱 순환> 중의 순환으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그 구성이 동심원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부분만 다시 한 번 그 구조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에피소드는 ‘야곱’이 ‘라반’의 집에 당도하고 떠나는 이야기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두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는 ‘야곱’과 ‘라반’이 서로를 속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그 한가운데 ‘이스라엘’의 조상들 즉 ‘야곱’의 자식들이 태어나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섯 개의 에피소드는 구성에 있어서나, 그 내용에 있어 일관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그 자체로서 결코 독립적인 이야기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29장만 하드라도 앞의 이야기들을 연상시켜주는 내용들이 상당 수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야기 벽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야곱’이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는 언급은(1절) 직전의 이야기 ‘벧엘’의 체험(28:10-22)과 불가분 연장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는 장면은(2-14절) ‘아브라함’의 하인이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나는 ‘에피소드’(24:11-50)를 연상시켜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화자는 ‘리브가’를 언급할 때마다 ‘라반’의 누이로 소개하고 있는데(5, 10-14절), 두 사람의 관계는 익히 알려진 바대로입니다(22:23; 24:29; 27:43). 그리고 ‘야곱’이 ‘라반’의 집에 당도하여 그동안 일어났던 “이 모든 일”을 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마도 그의 탄생과 형과의 갈등 그리고 최근에 그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26-28장)을 이르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 속에는 28장뿐만 아니라, 27장을 연상시켜주는 내용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리브가’는 ‘야곱’을 ‘하란’으로 떠나보내면서 “며칠만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27:44),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문 처음 7년이 불과 며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29:19-20). 더 나아가 ‘야곱’이 ‘라반’에게 속아 그가 원했던 둘 째 딸 ‘라헬’ 대신에 첫 딸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는(25-26절), 둘째 아들이었던 자신이 첫 아들 ‘에서’를 속여 장자 권과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채는 지난 이야기와는(25:23;34; 27:19, 35) 흥미로운 비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야곱’이 ‘하란’을 떠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가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는 다음 이야기를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31:3, 13, 17). 이처럼 <야곱-라반 이야기>는 나름대로 기승전결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임에 분명하지만, <야곱 이야기>의 나머지 이야기와 별개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할 것입니다.
본문의 단락을 구분하는 일은 그렇게 만만치는 않은 것이,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고, 14절 이후에는 일종의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15-30절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과연 새로운 에피소드로 보아야 할 것인지, 또는 직전의 내용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14절과 15절 사이에는 한 달이라는 긴 간격이 있다는 사실은 29장을 다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마찬가지로 족장이 우물가에서 미래의 신부를 만나고 있는 장면은(1-14절) 일종의 전형(典型)에 해당하는 설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창 24장; 출 2:15-21). 그러나 29장을 단락 구분 없는 하나의 단위로 보든, 두 개의 단위로 보든 주석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29장을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볼 때, 1-14절은 ‘야곱’의 결혼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배경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야곱’의 기질이나 하나님의 섭리 등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1-14절은 세 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장면마다 ‘야곱’이 각기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 1-9절‘야곱’과 ‘하란’의 목동들의 만남
(2) 10-12절‘야곱’과 ‘라헬’의 만남
(3) 13-14절‘야곱’이 ‘라반’의 집에 머물다
자료와 편집. 본문이 <야훼 전승>에 속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야곱’이 동방으로 떠났다는 1절의 언급은 <야훼 자료>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내용으로서, 따라서 이 절을 <엘로힘 자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나 내용이 새롭거나 또는 독특하다고 해서 다른 전승으로 귀결시키는 데에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라, 대부분의 자료비평 학자들은 본문이 <야훼 자료>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학과 신앙
본문 내용은 24장에서 보는 것처럼 약혼과 관련된 하나의 “전형 장면”(type scene)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즉 주인공이 한 낯선 땅으로 가서, 그곳 우물가에서 미래의 신부가 될 처녀를 만나, 그녀가 이끄는 가축들에게 물을 주는 설정이 그것입니다. 동시에 이와 유사한 다른 이야기와의 차이를 비교해 봄으로써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만남 1: 야곱과 목동들(1-9절)
화자는 첫 장면에서 ‘야곱’이 ‘하란’의 목동들을 만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 묘사가 필요 이상으로 장황하고 사실적입니다. 예를 들어, 세 무리의 양 떼가 우물 주변에 누워있고, 큰 돌이 우물 아귀를 덮고 있다든 등의 묘사가 그렇습니다. 큰 돌이 주는 중압감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당시의 관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의도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앞으로 ‘야곱’이 ’라반‘의 가축들에게 물을 주기 위하여 그 돌을 보란 듯이 혼자서 치워버리는 행동과 극적인 대조를 이룰 것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바로 이점이 첫 장면에서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먼저 화자는 단순히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갔다고 하는 대신(참고, 28:10),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고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1절)
“길을 떠나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발(לגר, 레겔)을 들어올리다(אשׂנ, 나사)”입니다.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이라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만, ‘벧엘’에서의 체험을 상기해 볼 때 상당히 즐겁고 들떠 있는 상태를 암시해주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Wenham). 혹자는 ‘야곱’이 ‘벧엘’에서의 체험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Calvin). 그러나 Hamilton은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동방 땅은 늘 “심판과 추방”(4:16), “허무와 상실”(11:2; 13:11), 또는 “고독과 유리”(25:6)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동방을 향하고 있는 ‘야곱’의 지금 심정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가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낙담과 고통스러운 마음은 지속적으로 그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동방 사람”은 많은 양과 낙타 떼를 가지고 있으며(욥 1:3), ‘요단’ 동편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기드온’ 시절에 ‘아말렉’과 ‘미디안’ 족속들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도 합니다(삿 6:3, 33; 8:10, 11). 그러나 ‘야곱’이 동방을 향했다는 것은 단순히 동쪽을 향해서 떠났다는 정도로 이해함이 더 나을 듯합니다.
‘야곱’이 그 땅에서 처음 목격하게 된 것은 예측대로, 들판의 우물과 그 주위에 누워 있는 세 무리의 양 떼입니다:
2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2-3절)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모습이지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화자의 의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우선 그는 ‘야곱’의 눈을 통해서 그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 풍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해설을 통해서 소상하게 밝혀주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가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싶은 부분은 우물 아귀를 덮고 있는 “큰 돌”로서, 이에 대해서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양 세 떼는 단순히 우물가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무리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모인 뒤에야 비로소 목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그 “큰 돌”을 치우고서는 물을 마시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목동들에게 물어본 뒤에야 알게 될 것입니다(8절). 아무튼 이 장면에서 독자가 받게 되는 암시와 인상은 어떤 것입니까?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화자의 의도의 일단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과 목동들 사이에 오가는 이 대화는 네 번에 걸친 ‘야곱’의 질문과 이에 대한 목동들의 퉁명스러운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4-6절)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라진 ‘야곱’의 모습입니다. 아주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면서 동시에 예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힘든 여행을 통해서 많이 성숙해졌을 수도 있고, ‘벧엘’에서의 경험이 자신을 갖게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Wenham). 지금 그가 목도하고 있는 이 장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런 태도와는 달리 질문에 답하는 목동들은 소극적이며 썰렁하기만 합니다. “라헬이 양을 몰고 있다”는 언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기 네 사촌이 오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렴.” 목동들의 이러한 냉랭한 태도는 조금 후 ‘라반’이 보여줄 극진한 환대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목동들의 설명은 다른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독자들은 멀리서부터 양 떼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라헬’을 ‘야곱’과 함께 바라보면서 이 처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화자는 지금 fade-in의 기법을 동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직전의 공손한 모습과는 달리 무례하고도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맙니다: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7절)
그토록 찾고 싶어 하는 ‘라반’의 딸이 오고 있다는데, 느닷없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표하는 것일까? 마치 빈둥빈둥 놀고 있는 목동들에게 빨리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다시 들로 나가 일을 계속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다운 아가씨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일을 핑계로 이들을 멀리 쫒아버리고 싶은 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Hamilton). 이런 태도가 목동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그들은 비로소 길고도 상세하게 대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8절)
화자가 앞에서 이미 밝혀놓은 바 있는 그 이유를(3절)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듣게 됩니다. 즉 이들이 정해 놓은 관례란 모든 양 떼들이 다 모인 후에 우물 아귀에 놓인 돌을 치우고 함께 물을 마시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목동들은 왜 자신들이 먼저 와 있는지, 또는 왜 시간에 맞추어 오지 않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혹시 먼저 온 순서대로 물을 마시우게 하기 때문에 미리 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Gunkel). 그러나 조금 후에 드러나겠지만 이 관례는 ‘야곱’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8절이 기능하는 바가 있습니다. 즉 향후 보게 될 ‘야곱’의 행동을 전망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목동들과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드디어 ‘라헬’이 양 떼와 함께 도착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지금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마치 노래 부르듯 강조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9절)
앞으로 ‘야곱’의 일생을 바꾸어 놓게 될 ‘라헬’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극적인 만남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유사한 이야기가 없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하인이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만나는 이야기가 그렇고(24:10-33), ‘모세’가 ‘이드로’의 딸들을 만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출 2:15-21). 이들 이야기에는 일련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1) 만남이 모두 주인공이 여행 중에 한 우물가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2) 한 처녀(또는 처녀들)가 그 우물가로 물을 길러 왔다는 점; (3) 주인공(또는 처녀)이 상대를 위해 물을 길어주는 점; (4) 처녀(또는 처녀들)가 그 부모에게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 점; (5) 주인공이 여자의 집으로 안내를 받아 가는 점; (6) 두 사람 사이의 결혼이 성사된다는 점. <창세기>의 두 이야기는 더 많은 유사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주인공이 찾아간 낯선 땅은 다름 아닌 그들 조상의 땅이며,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촌 간이거나 사촌의 딸이라는 사실 등이 그렇습니다.
2. 만남 2: 야곱과 라헬(10-12절)
이제 ‘야곱’의 반응을 살펴볼 일입니다. 직전에 목동들이 그를 맞이하던 것과는 판이한 태도로 미래의 신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10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10-12절)
‘라헬’의 양 떼를 보자마자,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규칙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러 목동들이 힘을 합쳐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우물 아귀의 그 “큰 돌”을 혼자서 옮겨놓습니다. 그리고는 양 떼들에게 물을 먹이고,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울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정중하게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 텐데, 그의 행동은 완전히 궤도를 벗어난 기이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성경 이야기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입을 맞추는 일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주로 동성 간에 인사를 건네거나 축복을 기원할 때 보이는 행동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입맞춤을 하는 경우는, ‘라반’이 그의 딸들과 손자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는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31:55).
마침내 친척을 만났다는 기쁨과 안도감으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야곱’이 어디로 가든 늘 그와 함께 하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나 큰 소리로 울었다는 표현은 이전에 ‘에서’에 대해서도 사용한 바 있습니다(27:38). 그러나 ‘에서’가 슬픔과 비통으로 크게 울었다면, ‘야곱’은 기쁨과 안도감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것입니다.
3. 만남 3: 야곱과 라반(13-14절)
민첩하고 재빠르기로는 ‘야곱’이나 그의 외삼촌 ‘라반’은 막상막하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나 라반의 양 떼들에게 신속하게 물을 먹이고 있는 모습은 ‘라반’이 딸의 보고를 듣고 신속하게 달려 나와 ‘야곱’을 맞아들이고 있는 모습과 좋은 병행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13절)
‘야곱’이 ‘라헬’에게 단순히 입만 맞추었다면, ‘라반’은 달려 나와 ‘야곱’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수년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이삭’의 하인이 자신의 누이 ‘리브가’를 데리려 왔을 때 엄청난 재물 세례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선물 공세를 기대하면서 다소 과장된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랬다면 기대는 곧장 실망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야곱’은 낙타 열 마리에 선물을 가득 실은 사절단 대표로서가 아니라, 도망자의 신세로 지금 여기 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반’의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두 사람의 첫 대면은 처음부터 어그러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야곱’은 그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을 ‘라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과연 얼마만큼 들려주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와 형을 속였다는 이야기도 했을까? 그래서 형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도 했을까? 도망쳐 나올 때 그의 부모가 외삼촌의 집에서 며칠 동안만 피신해 있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도 했을까? 그리고 외삼촌의 딸들 중 하나와 결혼하라고 했던 이야기도 했을까? 화자는 이들 질문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만, ‘야곱’이 과거지사를 하나씩 들려줄 때마다, ‘라반’의 낙담은 깊어만 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선물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은혜를 베풀고 내주어야할 할 입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라반’의 다음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였더니(14절)
한 가족, 친척임을 강조하는 이런 표현은 <에덴 이야기>를 위시해서(2:23), <구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삿 9:2; 삼하 5:1; 삼하 19:13). ‘라반’의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지금 그는 조카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내 혈육이 맞으니 어쩔 수 없구나”는 자조(自嘲)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그가 ‘야곱’에게 보여줄 이중적인 모습은 후자의 해석을 더욱 타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편에서는 이 말을 진정이 담긴 따뜻한 환대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가 ‘라반’의 집에 한 달을 머물렀다는 언급은 ‘리브가’가 ‘야곱’에게 “며칠만 외삼촌 집에 머물러라”고 했던 지시를 생각나게 합니다(27:44). ‘라반’ 역시 이렇게 나타난 ‘야곱’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제 과연 ‘야곱’이 ‘라반’의 딸과 결혼하여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요? 그 한 달 뒤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만 같이 보였던 벽두의 장면은 이렇게 애매하고 불확실하게 끝나고 있습니다. 마치 처음의 기대와 확신이 지나친 낙관이었다고 충고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교훈과 적용
“아침에 맑겠으나 오후부터 점차 흐리다가 저녁 늦게 비가 오겠습니다.” 흔히 듣는 일기예보 중의 하나입니다. <야곱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본문의 시점은 밝은 아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인생의 ‘루스’에서 하나님을 만나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그곳은 ‘루스’가 아니라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야곱’이 놀라 외친 고백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이곳에도 계셨구나!” 그렇습니다.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던 그곳,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여겼던 그곳에서도 여전히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려운 신학 용어를 빌자면 “하나님은 無所不在하시다”입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십니다. <신약>에서 ‘바울’ 사도는 이점을 더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의 집이니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에 그냥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미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28:14),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을 그 모든 것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28:15).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런 엄청난 약속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여태 맞이한 어느 아침이 오늘보다 더 맑고 상쾌할 수 있었겠습니까! 동쪽으로부터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는 아침 태양은 동방을 향한 그의 가벼운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고 있습니다. 지난 밤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곁에 누구라도 있다면 붙잡고 자랑이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발걸음은 춤추듯 노래하듯 두둥실 구름 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얼마 못가 그는 한 우물가에 당도하였고, 그 주위에 평화스럽게 누워있는 양 떼들과 목동들을 만납니다. “혹시 저 사람들이 내 외삼촌을 알고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는 달려갑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묻고 싶은 질문들을 연거푸 쏟아냅니다. “혹시 라반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지금 그 분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목동들의 대답이 퉁명스럽고 친절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원하는 정보는 모두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얻은 정보가 사실이라는 점을 재 학인이라도 해주듯, 저만치서 외사촌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오는 것이 아닙니까! ‘야곱’은 “과연!”하며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외에 달리 이런 만남을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살아가면서 혹시 이런 경험 가져본 적은 없습니까?
왜 그러냐고요? “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기억력 좋은 ‘야곱’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의 신부 감을 구하기 위하여 한 하인을 이곳에 보냈을 때, 그 역시 우물가에서(동일한 우물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리브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 만남은 하인의 구체적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응답(시기와 방법에 있어)이었습니다. 하인도 이점을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 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24:27). ‘야곱’ 역시 ‘라헬’을 보는 순간 이런 믿음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화자는 이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어지는 ‘야곱’의 언행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조금 전까지의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돌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동들을 나무라고 훈계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해가 아직 놓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7절). 이제 이들이 주변에 있는 것이 귀찮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는 말일까요?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추측컨대 ‘벧엘’에서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에피소드는 이전에 보았던 <하인과 리브가 에피소드>와는 다른 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물을 길어 하인의 나타들에게 물을 먹이는 등 적극적이고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쪽이 ‘리브가’였다면, 이번에는 ‘야곱’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너무 무거워 도저히 혼자서는 옮길 수 없는 우물 아귀를 덮고 있던 그 “큰 돌”을 혼자서 치우고서는 양 떼들에게 물을 먹이고 있습니다: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10절). 유순하고 조용하며 집에서만 지내기를 좋아하던 그에게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났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두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라반’의 태도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는 “달려 나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13절). 그가 무엇을 기대하며 달려 나왔는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전에 본 것을 기억한다면 그의 기대와 흥분은 곧 실망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가지고 온 것은 큰 무리의 낙타 등에 실린 많은 선물이 아니라 헐헐 단신뿐이기 때문입니다. 확신과 기대의 거품이 꺼지기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비 신부가 우물로부터 함께 따라오기는 했습니다만, ‘리브가’와는 달리 ‘라헬’의 정혼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과연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인가? 부모의 말대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 집에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약속하신대로 그분의 보호와 인도 때문이었습니다. 첫눈에 반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라헬’을 만나게 된 것도 물론 그분의 섭리였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여자와 결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자녀들을 낳아 그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은커녕 결혼에 대한 아무런 언급조차 없습니다. 화자는 ‘야곱’이 그냥 외삼촌 집에서 한 달간 머물었다고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벧엘의 약속”이 실현은 되기 시작했으나 나머지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지는 여전히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쨍쨍하게 비치던 아침 햇살이 오후가 되면서 서서히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듯합니다. 이제 조만간 한바탕 큰 비가 내릴 것이고, 우물 아귀를 덮고 있던 그 “큰 돌”보다 훨씬 더 큰 장애물을 치우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향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직 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 역시 ‘라반’의 집에 당도한 ‘야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역설이 있다면 그것이 늘 불확실하다는 것이겠지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밝은 태양이 비치기는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신 결과인가 하고 감사하려하면, 어느새 먹구름과 비바람 가운데 내몰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회의와 절망감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우리 인생에서 너무 자주 반복되는 일상사가 되어버린지라 밝은 태양이 오히려 부담스럽고 두렵기조차 합니다. 또 언제 먹구름이 몰려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요. ‘욥’이 늘 이런 불안감 가운데 살아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을 때 늘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재난에 대한 보험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절망과 분노와 배신감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욥’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라고 예외일 수가 있을까요? 예외일 수가 없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갈 것인가?
‘욥’처럼 늘 엄숙하게, 긴장과 두려움으로 재난 대비용 수칙과 식량들을 매일 점검하며 살아가야 할까? 평시에도 늘 전시를 대비해서 비상식량과 물자들을 비축하며 살아야 할까? 하기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다가올 종말을 그렇게 대비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기도 합니다(마 24). 우리가 만일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우리가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사는 것”이라고 칭찬하실까? <마태 복음>은 주인의 마음을 바늘같이 꿰뚫어 볼 줄 아는 한 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를 위임받았는데, 그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사용하여 이자를 늘이기보다는 땅 속에 묻어두기로 작정합니다. 나중에 이 종에 대해서 주인이 뭐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게 때문에 그의 권면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벧엘의 언약”이 그것입니다. ‘야곱’에게 그것이 “벧엘의 언약”이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언약”입니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알려고 골머리를 앓는 대신, 우리를 향해서 분명하게 드러난 그분의 뜻을 믿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이 무엇일까요?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연습과 토의
1. <야곱 이야기> 전체에서 본문이 차지하는 문학적 기능이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본문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그리고 이 주제를 뒷받침 할 만 한 장면이 있습니까?
3. 다음 제목으로 설교문을 작성해 봅시다: “아침에는 맑음, 오후에 흐림, 저녁 늦게는 비.”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