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2과
다말과 유다
김태정 목사창세기 37:2상약 51분 분량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7:2상)
“유다와 다말” 이야기도 “디나의 수치”(창 34)만큼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감추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후자(後者)가 종교를 앞세운 이스라엘의 야만적 폭력을 다루고 있다면, 전자(前者)는 명예를 앞세운 거짓과 위선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 모두 이스라엘과 이방인 간에 벌어진 것으로서, 여인이 이야기의 핵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전자가 이방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면, 후자는 이스라엘 여인이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에서,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창 26장)에서처럼,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경외하고 신뢰함에 있어서는 이스라엘보다는 오히려 이방인 한 수 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볼 때,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분명 문학적 일탈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디나 이야기>나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가 <야곱 이야기>에 포함될 수 있는 신학적 당위성이 있는 것만큼 본문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과연 본문이 <요셉 이야기>에 포함됨이 마땅한가? 그렇다면 어떤 문학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가? 즉 어떤 설화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족장 이야기>의 다른 내용들과 어떤 신학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더 나아가 <창세기> 전체의 주제와는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들 질문들이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요셉 이야기>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창세기> 내에서 그 단락과 범위가 뚜렷한 한 편의 문학 단위로서, 전체적으로 여섯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 하지만 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요셉 이야기>와는 내용 상 아무 상관도 없어 보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순조로운 진행에는 오히려 본문이 없는 편이 더 낫습니다(즉 37장은 39장으로 더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38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의 축복”을 담고 있는 49장이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 필요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처럼 일견 불필요하게 보이는 일단의 에피소드들이 <요셉 이야기>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야곱 이야기>에서도 발견한 바 있습니다. 예컨대, <야곱 이야기>의 열 세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고 있는 “이삭과 블레셋” 이야기(26장)나 이와 교차대구를 이루는 열두 번째 에피소드인 “디나와 히윗” 이야기(34장)는 <야곱 이야기>의 전체 구성에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해당 본문의 문학과 역사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참고. 28과 & 29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에피소드는 <야곱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에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도 <요셉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선 “다말과 유다” 이야기가 느닷없이 이곳에 등장함으로써 일종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볼 때, <요셉 이야기>의 이어지는 내용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오게 되는 과정이라든지 또는 ‘가나안’에 남아있는 그의 아버지 ‘야곱’이나 다른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인데, 화자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8장은 ‘요셉’이 그의 가족으로부터 상당히 오래 동안 동안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유다’는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며, 이들이 장성하여 결혼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38장이 보여주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문학적 기능으로 볼 때, 본문은 ‘요셉’ 가족사(家族事)에 대한 음악적 “대위법”(對位法)에 해당하며, 대위법(對位法)이란 2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동시에 결합시키는 작곡상의 기법으로 “대위법”이라는 말은 “한 점과 다른 한 점”(point counter point)에서 생긴 것이며, 여기서 “점”은 “선율”을 가리킨다. 따라서 선율 대 선율의 관계가 바로 대위법이다.
수사학적(修辭學的) 기능으로 보자면 흔히 “예변법”(豫辨法)적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리한 독자라면 본문을 통해서 <요셉 이야기> 전체에 대한 보다 넓은 조망(眺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등에 대해서 예견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분명하고 뚜렷한 예를 한 가지 들 수 있겠습니까? 다음 두 장면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5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38:25-26)
32그의 채색 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37:32-33)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사필귀정(事必歸正) 내지는 하나님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대가로 자식들로부터 속임을 당하게 되며, ‘유다’ 역시 이전에 아버지 ‘야곱’을 속인 대가로 며느리 ‘다말’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의 경우 모두 등장인물들이 속임수에 사용한 것은 염소와 옷이었습니다.
이 두 장면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좀 더 일반화 시켜보자면, 불의(不義)는 바로잡아지며, 과실을 저지른 자는 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은(38:26) 훗날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장면과 좋은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신학적 주제는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선택과 유기”(選擇과 遺棄)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항상 형제들 중 나이 어린 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보다는 ‘아벨’, ‘에서’보다는 ‘야곱’, ‘르우벤’보다는 ‘요셉’, 그리고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을 선호하신 것처럼, 이곳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유지되고 있는 사례가 두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다’의 세 아들 ‘엘’과 ‘오난’과 ‘셀라’ 중에서 막내만이 살아남는 것을 볼 수 있으며(3-11절), ‘다말’이 쌍둥이 ‘세라’와 ‘베레스’를 해산할 때에도 ‘세라’의 손이 먼저 나왔으므로 그를 형으로 불러야 할 것이나, 실질적으로는 아우 ‘베레스’가 형의 손을 들이고 먼저 태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27-30절). 그리고 ‘베레스’가 훗날 ‘다윗’의 조상이 되며, 다윗 또한 ‘이새’의 막내아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 자가 적통을 이어간다는 <창세기>의 모티브는 당장 <요셉 이야기> 내에서도 두 번에 걸친 ‘요셉’의 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은 물론 그의 아비조차도 요셉에게 머리를 숙이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이 두 번의 꿈은 결국에는 그 꿈이 성취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강력한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가 <요셉 이야기>의 다른 내용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대목은 없습니까? 두 인물 ‘야곱’과 ‘유다’를 비교해 봄으로써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을 때 두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땅을 치며 통곡했던 것에 비해(37장), ‘유다’가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38:7-10) 어떻게 했는지에 관해서 화자는 의도적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냉혹한 그의 일면을 보여주려 함이 아닐까요? 사실 ‘르우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팔면 돈이 된다는 제안을 한 자도 ‘유다’였습니다. 어쩌면 ‘요셉’의 죽음에 관해서 그들의 아비 ‘야곱’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꾸미는 일에도 그가 주도적으로 간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슬픔을 표하기는커녕, 나중에 며느리 ‘다말’을 불태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같은 <요셉 이야기> 내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유다’를 만나기도 합니다(44:18-34). 즉 훗날 이집트에서 그들의 또 다른 이복동생 ‘벤야민’을 볼모로 두고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유다’는 ‘요셉’의 죽음으로 큰 슬픔을 당한 아버지 ‘야곱’에게 다시 한 번 상심을 줄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대신 인질로 잡혀 있겠다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며느리가 행음했다하여 죽이려 했으나 다말의 항변을 듣고 충격에 빠져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바 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38:26). 결국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이처럼 달라진 ‘유다’의 모습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의 각 <족장 이야기>는 주인공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점 ‘르우벤’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의 첩과 간통을 할 정도의 패륜을 저질렀던 그가 ‘요셉’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형제들을 설득하며 아버지를 배려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 자신은 어떻습니까? 형들의 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던 열일곱의 철부지였던 그가 복수가 아닌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는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요셉 이야기>는 그 제목이 함축하고 있듯이 “요셉의 족보”가 아니라 “야곱의 족보”를 다루고 있으므로, 이런 점에서 본다면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38장은 전체 이야기에서 전혀 무관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는 단순히 ‘요셉’ 개인이 아니라 ‘야곱’의 가족사(家族事)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 이야기>가 ‘요셉’이 아닌 가족의 다른 구성원을 다룬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은 본문이 <창세기>의 주제와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본문은 땅과 후손과 축복을 다루고 있는 “아브라함 언약”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38장에서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후손”에 관한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代)를 이을 자손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유다’의 장자 ‘엘’은 일찍 죽고 없고, 그의 동생 ‘오난’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가야 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허나 정작 과부 ‘다말’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갖고 싶어 합니다. 두 남편을 불의의 죽음으로 먼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시동생 ‘셀라’와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반대로 좌절을 겪자 이번에는 그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탄생시키고 맙니다. 과연 ‘다말’의 이런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신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한 이방 여인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결단과 의지는, 윤리∙도덕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인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말’은 38장 에피소드의 여주인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멜기세댁’(14장)이나 ‘아비멜렉’(26장)처럼, 이방인으로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분별해 내고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 여기려 했던 영웅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아브라함 언약”이 ‘다말’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점에서 ‘다말’은 ‘룻’의 영적 조상이자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훗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며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룻 1:16). ‘여리고’의 기생 ‘라합’ 역시 같은 반열에 속하는 자로서, 이들 세 여인이 모두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자료와 편집.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이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과는 다른 구전 형태의 양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야훼 자료>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웨스터만’(Westermann) 등은 이런 견해에 반대를 표하면서 후대의 첨가 또는 삽입으로 보고자 합니다만, 그 근거는 다소 희박합니다. 본문을 후대의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보는 데에는, <요셉 이야기> 내의 다른 본문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데 실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삽입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연대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곳이 가장 적절한 위치로 보이며, 문맥상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더욱 본문의 자료를 <야훼 자료>로 인정함에 있어 무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유다의 결혼(1-5절)
에피소드의 첫 번째 단락은 ‘유다’와 ‘가나안’ 여인의 결혼, 그리고 세 아들의 탄생에 관한 화자의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1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1-5절)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선 이 결혼에 관한 화자의 입장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듯싶습니다.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만, ‘유다’가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 동침하였다”고 진술함으로써 이 결합이 정식 결혼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신부의 이름조차 거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설사 이 결혼이 부모의 승인 하에 이루어진 정식 결혼이었다고 해도, <오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아들 ‘이삭’이 ‘가나안’ 여인과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24:3), ‘이삭’과 ‘리브가’도 그들의 아들 ‘에서’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그래서 ‘야곱’이 이런 결혼은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27:46-28:1). 그렇다면 ‘야곱’은 아들 ‘유다’의 결혼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반대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결혼을 강했습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편애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므온’ 역시 이방인 여인과 결혼했으며(46:10), ‘요셉’ 또한 이집트의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41:45). 결국 ‘유다’의 결혼은 다른 형제들의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한 예고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8장은 적어도 22 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대 계산을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37:2; 41:46-47; 45:6. 즉 요셉은 17 세에 이집트로 와서(37:2), 30 세에 총리가 되었으며(41:46), 그 때부터 7 년 동안의 풍년과(46:47), 2 년 동안의 흉년이 있은 후(45:6),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이 <요셉 이야기>의 다른 에피소드들과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유다’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직후에(“그 후에”, 1절상) 다른 형제들을 떠나 ‘헤브론’에서 ‘아둘람’으로 내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헤브론’ 은 해발 3040 피트에 위치한 도시로서 ‘가나안’ 남부 지역에서는 지리적으로 가장 높은 지역에 하당하므로, 이곳으로부터 북서쪽의 ‘유대’ 구릉지의 ‘아둘람’ 으로 내려갔다는 표현은 적절해 보입니다(참고. 삼상 22:1; 믹 1:15).
‘유다’가 왜 가족을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가 사는 근처로 거처를 옮겼는지 화자는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일로 아비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피신이었을 수도 있고, 충동적인 행동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의 행동 역시 충동적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즉 그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보고(ha;r, 라아), 취하여 동침하니”(jq'l, 라카흐)는 <창세기>에서 불법적이고 탐욕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친숙한 표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6; 6:2; 12:15; 34:2; 삿 14:1-2). 화자는 ‘유다’의 행동을 이런 방식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또한 여자의 이름 대신에 그녀의 아비의 이름만을 거명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 자가 나중에 ‘다말’을 ‘유다’에게 소개해 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나는 과정은 짧고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3-5절). 첫 아들 ‘엘’(r[)은 “지키다”는 의미이며, 둘째 아들 ‘오난’(@n:/a)은 “강하다”, “힘세다”를 의미하며, 막내아들 ‘셀라’(hl;v)는 “청원”, “요청”의 의미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유다’는 ‘아둘람’에서 다시 ‘거십’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동일한 이름으로 <성경> 어디에도 이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여호수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나안’ 중부의 ‘악십’과 동일한 지역일 수도 있습니다(수 15:44).
2. 다말의 결혼(6-11절)
두 번째 단락은 ‘다말’(종려나무)을 이야기의 여주인공으로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나안’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아마 ‘아둘람’이나 또는 ‘거십’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하겠습니다. ‘유다’는 첫 아들 ‘엘’을 위하여 이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6절)
‘유다’가 며느리를 직접 선택하고 있는 이 장면은 흥미로운 데가 있습니다. 즉 자기는 멋대로 여자를 취하여 결혼을 했음에도, 그 자유를 아들에게까지 적용해 주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Hamilton).
아무튼 장자 ‘엘’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화자는 그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7절)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를 제거하셨다는 것으로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엘’은 <창세기>의 여러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다른 많은 비운의 첫 아들(‘가인’, ‘이스마엘’, ‘르우벤’, 등)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정확하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악하다고 해서 집단이나 개인을 이처럼 직접 죽이신 일은 “대홍수”나 “소돔과 고모라 사건”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엘’은 하나님께서 직접 죽이신 첫 인물로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죄가 심각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의 죄목을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 대목이 화자의 관심사는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핵심은 ‘엘’은 죽어 마땅하지만, ‘다말’은 이와 무관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엘’의 죽음과 관련해서 화자의 의도적인 침묵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유다’가 슬퍼하고 애곡했다는 언급이 없는 것이,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 ‘야곱’이 보여주던 행동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참고. 36:34-35). 여기서 침묵의 역설은 무엇입니까?
아마 ‘유다’에게 더 큰 관심사는 가계를 잇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관례에 따라 둘째 아들로 하여금 장자의 기업을 무르게 할 참입니다. 즉 죽은 형을 대신하여 동생이 미망인 형수와 결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8절)
이 장면은 썩 마음에 내켜하지 않는 둘째 아들을 설득하고 있는 아비의 은근하면서도 강압적인 모습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아우의 본문을 다하라”고 하는 것이나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는 명령 등이 불의의 죽음을 당한 형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법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왜 ‘유다’는 여기서 다말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지 않을까? 왜 그는 아들에게 “‘다말’과 결혼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형수에게로 들어가라”고 다소 애매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꺼림직 해 하는 둘째 아들의 기분을 살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난’이 형수와의 결혼을 싫어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고엘’ 법”에 따르면, 죽은 형을 대신하여 동생이 미망인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은 물론 자식에게 물려줄 모든 유산마저도 형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난’은 이처럼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9절)
형수와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성관계는 가졌으나, 형수가 임신하는 것이 싫어 자의적인 피임법을 선택했습니다(그는 단순히 즐기기만 했을까요?). 이 구절이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바는, 그가 이렇게 한 것이 한 번이 아니고 매번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10절)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다”는 다른 말로 “그가 여호와에게 반항하다(대들다)”에 가깝습니다. 사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대위임령”(1:28; 8:17; 9:1, 7), 즉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우습게 여기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언약 속에 “동성애”라든지 ‘오난’이 시도하고 있는 자의적(自意的)인 “피임법”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오난’의 행위가 특별히 괘씸한 것은 <족장 이야기>에서 후손과 관련한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17:6, 20; 28:3; 35:11; 참고. 15:5; 22:17; 26:4; 32:13)을 무위(無爲)로 돌리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38:8-9절 사이에서 후손 즉 “씨”가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오난’의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했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내버려 두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유다’가 보인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다시 한 번 침묵의 역설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슬픔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선 듯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막내아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11절)
두 아들이 죽었으니 이번에는 세 번째 아들을 며느리와 결혼시켜야 했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로 하여금 친정집에 가서 막내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것을 두고 ‘유다’가 “고엘의 법”을 계속 지킬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으나,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유다’를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의 명시적인 진술이나 의도적인 침묵에 따르면, ‘유다’는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슬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연속적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나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3. 다말의 임신(12-19절)
지금까지 ‘다말’의 역할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다’와 그의 두 아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거나 따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동한 경우란 시아비의 말을 따라 친정 아비 집에 “가서”, “머문” 것이 전부입니다(11절하). 그러나 이 장면에서 ‘다말’은 완전히 딴 사람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타인이 저지르는 불의(不義)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피해자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격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유혹하기 위하여 그녀가 취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은 도발적이다 못해 파괴적이기까지 합니다:
12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당시 창녀의 복장이 따로 있었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유다’에게 ‘다말’의 복장은 행동은 창녀로 보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고혹적이고 도발적이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이를 보고 걸려 넘어가고 맙니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15절)
며느리에게 청상과부로 오랜 세월을 수절(守節)하도록 강요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성적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다말’의 유혹에 걸려 넘어가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16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16-18절)
‘유다’는 ‘다말’을 보자말자 단도직입적으로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편에서 보자면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구약>은 창녀와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매우 어리석은 짓으로 규정하고 있으며(잠 7), 특히 며느리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패륜적인 행위로서 율법은 이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20:12). 이렇게 볼 때 화자는 <구약>의 기준에 서서 ‘유다’를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장면에서 끊어졌던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대화가 이곳에서 다시 재개되고 있는데(16-18절), 대화의 분위기와 내용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상거래 하듯 합니다. 은근한 사전 뜸들이기를 모두 생략하고 ‘유다’는 단도직입적으로 ‘다말’에게 잠자리를 같이 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가 하면, ‘다말’은 이에 응대하면서 ‘유다’에게 대가와 담보물을 요구하는 등, 당시 근동 지방의 전형적인 상거래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담보물은 일종의 신용카드에 버금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흥정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행동은 약속이나 한 듯 일사천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다’가 담보물을 ‘다말’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가고”, ‘다말’이 “임신하다”는 표현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 결혼 이후 지금까지 오직 ‘유다’의 후손을 갖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던 ‘다말’의 목적이 이렇게 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속임수를 통해서 말입니다.
4. 유다가 다말을 찾음(20-23절)
네 번째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유다’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신의와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찬구 ‘아둘람’을 통해서 이전에 ‘다말’에게 약속했던 염소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Gunkel & Westermann):
20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20-23절)
그러나 화자가 보여주려는 ‘유다’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로 해학적입니다. 무엇이 해학적입니까? 진실로 지켜야 할 중대한 약속, 즉 며느리 ‘다말’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으면서, 창녀와의 하찮은 약속은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그의 위선적인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막내아들이 장성하면 며느리와 결혼시켜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만, 그가 충분히 장성했음에도 전혀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반면 창녀에게 염소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가서 준해주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통해서 전달하려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수치”(zWB, 부즈)를 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23절). 그가 창녀와 관계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그를 조롱할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지요. 그의 친구도 ‘유다’의 이런 심정을 알고 있는 듯, 동네 사람들에게 단순한 길거리의 창녀가 아니라 “성전의 창녀”(hv;deq, 케데샤)를 찾고 있다고 완곡어법을 사용하면서 수치를 피해가려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들은 당시 이방 신전에서 종사하던 “여 사제”로 불리던 자들일 것인데, 평범한 거리의 창녀들보다는 급이 다르며, 보다 존대 받던 사회적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보이는 위선적인 행태 중의 하나는 추악하고 부끄러운 일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담그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그 일에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고고한 체 하는 것이지요. 지금 ‘유다’의 모습이 영락없이 이런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을 명예를 중시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것이 화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유다’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는 것입니다만(23절상),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삼 개월 후면 모두가 알게 될 일입니다(참고, 24절).
5. 다말의 伸寃(24-26절)
이야기는 이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내 ‘다말’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유다’로부터 잘못했다는 고백을 받아내는 장면이 바로 그 절정입니다:
24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24-26절)
과연 석 달 후에 ‘유다’는 ‘다말’이 “행음”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24절). 이 정보는 분명 사실입니다. ‘다말’은 실질적으로는 과부이지만, 법적으로는 ‘셀라’의 약혼녀입니다. 따라서 다른 어느 누구와도 성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사실상 행음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비록 불공정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며느리를 처단함에 있어 법적으로 아무 하자는 없다 하겠습니다( 22:23-24). <신명기>는 ‘다말’의 경우처럼 정혼한 자가 간음을 행했을 때 돌로 쳐 죽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신 22:21). 그러나 “불로 태워 죽이는” 행위는 도를 넘은 것입니다. 다만 이 규정은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레 21:9).
위기의 순간을 맞아 ‘다말’은 비장(秘藏)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불의하고 불공정한 법 집행자 시아버지에 맞서 진실을 밝힙니다(25절). ‘유다’는 마침내 ‘다말’의 무죄를 그리고 자신의 유죄를 받아들입니다(26절).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에피소드가 전체 <요셉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를 예고하고 대변해주는 순간입니다. 어떻게요?
6. 후손의 탄생(27-30절)
이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의 결론이자, 또 다른 관점에서 <요셉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를 확대 내지는 이어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27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27-30절)
신학적 주제라 함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쌍둥이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의 탄생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25:24-26). 두 경우 모두 쌍둥이 형제는 서로 먼저 나오려고 경쟁하고 있으며,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창세기>의 오랜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경우에서 보면 먼저 손을 내민 자는 ‘세라’로서 그가 형이 되어야 마땅하나, 그 손을 도로 들이며 ‘베레스’가 먼저 나옴으로써 모두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페레스’가 의미하는 바가 ‘페레츠’($r<P), 즉 “헤치고 나오다”로서 그의 탄생과 관련한 극적인 사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한편 ‘세라’(jr'z, 제라흐)는 분명치는 않지만, “빛이 비춤” 또는 “여명”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교훈과 적용
1. 유다: 사람의 아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모범 답안은 “예수님을 보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말과 유다 이야기>에서 인간의 또 다른 모습, 즉 또 다른 의미에서 “가장 인간적인”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다름 아닌, 이야기의 한 축을 이끌어가고 있는 남자 주인공 ‘유다’입니다. 화자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말고(37장) 왜 느닷없이 ‘유다’를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 다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39장) ‘요셉’이 다시 등장하고 있으므로 차제에 두 사람을 비교해 보는 것도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즉 시험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약속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지금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또 한 사람은 ‘가나안’에서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강제로 팔려 왔으며, 또 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여자의 “성적 유혹”(性的 誘惑)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유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은 인생에서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만, 다른 한 사람은 오히려 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이 유혹을 거부할 자유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각기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극과 극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할 수 있다면, ‘유다’는 철저한 “인간의 아들”로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유다’를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으로, 그리고 ‘요셉’을 광야에서의 예수님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다’가 “성적 유혹” 앞에 걸려 넘어졌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을 가지고 “인간의 아들”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를 이렇게 부를 만한 더 많은 훈장들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별명은 그의 인격을 총체적으로 대변해주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보이스’(James M. Boice) 목사님은 ‘유다’의 잘못을 세 가지로 지적하면서, 각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죄질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간파하고 있습니다.
금지된 결혼. 우선 그의 첫 번째 훈장은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은 ‘유다’가 ‘가나안’에 간 것이 “그 때 이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만(1절),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추측컨대, ‘요셉’의 일로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를 피해 옮겨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친구들을 사귀었고, ‘수아’라 불리는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이 결혼이 특별히 잘못된 것입니까? <족장 이야기>에서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에 대해서 화자나 족장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이곳에서도 화자는 ‘유다’가 결혼한 상대가 누구인지 언급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듯 단순히 “‘수아’의 딸”이라고만 소개하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여자가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수아’의 딸이 죽었다”라고만 언급하고 있습니다(12절).
그리고 이 결혼은 부모의 사전 승인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유다’의 행동과 관련한 세 개의 동사가 이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보고, 취하여, 동침하니”(2절). 우리는 이 세 개의 연속적인 행위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조(元祖)가 누구인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원죄(原罪)의 시조 ‘하와’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유다’는 ‘하와’를 따랐으며, 이후 “대홍수” 시대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던 바를 따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지라”(6:2).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법인데, 훗날 ‘삼손’은 적어도 결혼의 문제에 관한 한 ‘유다’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유다’의 결혼 생활은 과연 행복했을까?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두 아들과 아내를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두 아들이 죽은 것은 자연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다고 화자는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7, 10절) 그의 가정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요약하자면 ‘유다’가 여자를 바라보는 태도는 ‘삼손’과 마찬가지로 충동적이었고, 즉흥적이었으며, 말초적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런 결혼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오경>에서처럼 빈번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이점에 있어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더 이상의 군소리가 필요 없는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개의 멍에를 두 소가 메고 갈 때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이성교제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데이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친구로 그냥 사귀는 것인데... 전도도 해야 하고...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이미 결혼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지 않는 자와 이혼해야 합니까? 특히 그 배우자가 나의 신앙을 이유로 핍박하고 괴롭히는 데도요?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버린 약속.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한 자가 사람들 앞에서 신실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라면, 사람과의 약속이나 언약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유다’의 두 번째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며느리 ‘다말’에게 했던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그 약속을 의도적으로 무시했거나 또는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가 받을 두 번째 훈장은 직무유기 또는 책임회피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내용인 즉은 이러합니다. 첫 아들 ‘엘’이 무슨 잘못인지 몰라도 하나님의 진노로 죽은 후에(7절), ‘유다’는 둘째 아들 ‘아논’을 ‘다말’과 결혼시켜 대(代)를 잇게 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마저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을 자초하고 맙니다(10절). ‘아논’이 형수를 통해서 형의 아들을 갖는 것을 싫어하여 자의적인 피임을 선택했기 문입니다(9절). 화자가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죽이셨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10절), ‘‘수혼’’(嫂婚)은 당시 사회적인 관례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법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수혼’’(嫂婚)이란 남편의 형제를 의미하는 라틴어 ‘레비르’(levir)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혼한 남자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 생존한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해야 하며, 또 이때 출생한 자녀는 죽은 형제의 자녀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관습은 유대인을 포함해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 법을 함께 거주하고 있는 형제에게까지 적용시키고 있습니다(25:5-10). 그러나 이 법이 <성경> 속의 명문 규정으로 정착된 것은 <족장 시대> 이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아들의 죽음에 대한 ‘유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막내아들 ‘셀라’로 하여금 대를 이어갈 것처럼 보입니다. 며느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있어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하니’’(11절상).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말’은 시아버지의 이 말을 진정성이 담긴 약속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곧바로 이어서 ‘유다’의 의도는 정 반대였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막내마저 죽을까 두려워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버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11절하). 사실 그는 며느리를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둘째 아들처럼 ‘‘수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둘째 아들처럼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닌가요?
‘유다’가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또는 ‘‘하나님 때문에 오는 두려움’’입니다. 두 아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버렸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잘못된 방식을 택했습니다. 두려운 하나님의 보호 속으로 피신하는 대신 오히려 거부하고 저항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자고 제안하던 것과는 딴 판입니다(21:22-23).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것과도 대조가 됩니다. 그리고 ‘‘정복전쟁’’ 당시 연전연승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두려워 하나님의 보호를 자청해왔던 ‘기브온’의 선택과도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참고. 수 9장). ‘유다’가 선택한 방식은 ‘아도니세덱’을 비롯한 ‘가나안’의 여러 왕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대적하고 저항하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권위에는 굴복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참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두 아들이 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고민한 흔적도 없고, 하나님에게 물어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전에 그가 이방 여자와 결혼할 때에 하나님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나님에게 물어보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믿고 따랐습니다. 결과는 ‘다말’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순리를 역리로. <로마서>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직무유기나 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고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범하게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롬 1:21-32). ‘유다’가 받게 될 세 번째 훈장은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에서 오래 살면 살수록 더욱 이방인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방인보다 더 이방인 같은 행동을 서슴없이 행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월이 한참이나 흐르도록 ‘유다’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 ‘다말’은 ‘셀라’의 아내가 되어 그를 통해서 자식을 낳는 대신,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서 스스로 아이를 갖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녀는 우선 과부의 복장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또는 신전 창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에나임’ 마을 어귀(또는 신전)에 앉아 ‘유다’가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14절).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유다’가 그녀를 보고 창녀로 알고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청합니다. ‘다말’은 화대(花代)를 요구하고, ‘유다’는 염소를 약속합니다. ‘다말’이 담보물을 요구하자, ‘유다’는 그 보증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건네줍니다(요즘으로 치자면 인감도장을 주었다고나 할까요). 일을 끝낸 후 ‘유다’가 돌아가 친구를 통해서 약속한 염소를 주려고 그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더 이상 공개적으로 그녀를 찾는 일을 그만두게 합니다. 그가 창녀와 관계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23절). ‘다말’이 일반 창녀의 신분을 하고 있었는지 또는 당시 흔하게 볼 수 있던 신전(神殿) 창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유다’가 이런 여자와 성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분명 금기시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의도적으로 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줄도 알면서 말입니다.
사필귀정. 그러나 그가 숨기고 싶은 사실은 이내 드러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삼 개월 후 ‘다말’의 배가 불러 온 것이지요. 과부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게 뭐가 잘못이란 말입니까? 남편이 죽고 없으니 새 결혼을 한다 해서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과부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는 그렇지만, 법적으로는 ‘셀라’와 정혼한 사이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순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 돌로 맞아 죽임을 당할 운명입니다.
이 소식이 시아버지 ‘유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다말’을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유다’의 냉혹하고 잔인한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법 집행관이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는 지금 다른 모습을 보여줌이 마땅할 것입니다. 즉 ‘셀라’가 장성하면 결혼시켜 주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떠올리며, “아, 불사. 내 불찰이었구나.” 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줌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회는커녕 며느리를 불로 태워죽일 생각을 하고 있으니 처벌치고는 과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이지요.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자신의 가증스러운 범죄를 들었을 때 ‘다윗’ 왕이 보인 반응도 이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이래저래 체질적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나는 어떻습니까?
마침내 ‘다말’이 죽음 일보 직전에 입을 엽니다. 비장(秘藏)의 카드를 꺼내든 것입니다. ‘유다’가 화대(花代)에 대한 담보로 맡겨 두었던 세 가지 증거물을 그에게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서 이야기는 절정을 맞이하면서 극적인 반전(反轉)을 이루고 있습니다. 피의자가 재판관을 향해서 진실, 즉 재판관의 비리와 치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25절). ‘유다’는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충격에 빠지는 듯 했으나, 입술을 깨물고는 ‘다말’의 무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26절). 피의자가 재판관으로, 재판관이 피의자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바로 그것입니다.
2. 다말: 믿음으로
이방 여인. <구약>이 천지창조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다면, <신약>은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마 1:1-17). 이 족보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네 여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다말’입니다. 두 번째 여인은 그 유명한 ‘여리고’의 기생 ‘라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압’ 여인 ‘룻’입니다. <구약>은 이 여인의 이름을 딴 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그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지만 “우리야의 아내”로 소개하고 있는 ‘히윗’ 족속 ‘밧세바’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지만 족보에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만, 예컨대, <창세기>의 대부분의 족보에 여인의 이름은 없습니다(창 5, 10, 11, 36, 46). 다만 <창세기> 4장에서 예외적으로 ‘라멕’의 아내들과 딸들을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계보는 가인의 후예들에 관한 것입니다. 기타 <역대상>(1-4장), <에스라>(2, 8, 10장), <느헤미야>(7, 11, 12장), <민수기>(3장), <룻>(4장), 그 어디에도 여자의 이름은 없습니다.
더욱 이례적인 것은 이들 여인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네 사람 중 셋은 자신들이 속해 있던 당시 사회의 윤리∙도덕적 잣대로써도 지탄받아 마땅한 죄 많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굳이 예수님의 족보에 여인이 포함되어야 한다면, ‘사라’나, ‘리브가’나 ‘레아’ 등과 같은 족장의 아내들이라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대도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성경>이 어떻게 이런 추잡한 여인들을 거룩한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세 여인은 몰라도 ‘다말’을 포함시킨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노릇입니다. ‘다말’은 ‘라합’처럼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밧세바’의 경우처럼 최고 권력자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잠자리를 같이 한 것도 아닙니다. 또는 ‘룻’처럼 어려운 가계를 꾸려가기 위해 ‘보아스’의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법적으로 “가계 무를 자”로서 ‘룻’과 결혼을 하드라도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라합’은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하나인 ‘베레스’의 후손인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습니다(마 1:3-6; 룻 4:18-21). 그리고 ‘밧세바’는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다말’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신분을 감춘 상태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마치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가계를 잇기 위해 그를 취하게 한 후 차례로 관계를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말’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다말’이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말’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이방이었거나 죄인이었기 때문에 포함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방인이었고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될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가 구원의 족보 속에 포함될 수 있었을까요?
믿음으로. <신약>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신약>은 ‘다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라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를 통해서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유명한 믿음의 장(章)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라합’은 ‘여리고’의 모든 주민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며, 성문을 걸어 잠그고 저항하고 있을 때, 반대로 하나님의 품속으로 도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녀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과의 전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호와 화평을 선택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녀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수 2:9-13).
그녀는 다른 주민들이 보는 것과 꼭 같은 것을 보았고, 꼭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무엇이 ‘라합’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싸우게 하는 대신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며 피신하게 만들었을까? “믿음”입니다. 어떤 종류의 믿음을 말합니까?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룻’과 ‘밧세바’도 이런 믿음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된 것일까요? 그렇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남편을 잃은 후 시어미 ‘나오미’의 권유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새 남편을 만나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헤세드’의 선택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헤세드’의 선택이란 현실적으로 볼 때 어리석은 선택을 말합니다. 하지 않아도 될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선택을 말합니다. 현실의 삶에서 지금까지 그녀가 보고 체험한 하나님은 실망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룻 1).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큰 손해를 자초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믿었습니다. 만일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만, 그녀 역시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룻’ 역시 ‘라합’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다말’은 어떻습니까? 그녀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을까요? ‘아브라함’과 ‘야곱’의 언약이 가리키고 있는 땅과 후손과 축복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다말’의 믿음에 대해서 그 어떠한 언급도 찾을 수 없습니다만, 그녀의 행동은 이를 증거하고도 남습니다. 그녀는 약속 밖의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아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처럼 땅에 헌신짝처럼 내 팽개친 하나님의 언약을 ‘다말’은 선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역시 ‘헤세드’의 선택이라 해야 할까요? ‘라합’이 현실적인 손실을 감수했다면, ‘다말’은 천륜(天倫)에 반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말’은 오히려 ‘유다’를 조롱하고 정죄했습니다. ‘유다’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38:26). ‘유다’의 고백인 즉은 ‘다말’이 자기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윤리∙도덕적인 선택이 아니라 신학적인 선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선택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드는 영예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의 족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그 속에 포함될 수 있었습니까? 나의 영적 부모는 누구였습니까?
3. 하나님: 오직 은혜로
일을 아니 할지라도. 필자가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하던 때였습니다. 거의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한 부부가 과일을 사들고는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그곳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롭고 적적해서 처음 한 동안 그 사람들이 오는 것이 반가웠습니다만, 점차 갈수록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에 조용히 좀 쉬고 싶은데 우리의 그러한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찾아오는 그들의 무례함이 싫었고, 또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상식을 가진 자라면, 그리고 필자처럼 “의로운 지성인”으로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라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그리스도들인 스스로가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들렸습니다. 필자는 기독교란 참으로 편리한 종교로구나 생각하면서 그 부부와 종종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이란, 한 직원이 출근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쌓은 실적도 아무 것도 없는데도 매달 빠뜨리지 않고 월급을 지급해주는 정신 나간 사장님과 같았습니다. 그 직원의 입장에 보자면 그야말로 고맙기 그지없는 사장이겠지만, 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일만하는 동료 직원들에게는 불공평하기가 짝이 없는 사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라면 누가 이런 회사에 근무하고 싶겠습니까? 이런 회사는 게으른 자의 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런 천국과도 같은 회사가 있다고 합니다. 현대 자동차 영업부에 근무하는 한 친구가 아주 화가 나서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차 한 대 팔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뛰어 다니는데, 한 달 내내 차 한 대 팔지 않고도 월급은 자기와 비슷하게 꼬박꼬박 타가는 동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노조(勞組)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오히려 비웃기까지 합니다. 누가 자기더러 열심히 차를 팔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회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회사의 사장님은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자 원칙 아닙니까? 그리고 무엇인가 잘못했으면 응분의 대가를 받게 해야만 조직이나 나라나 할 것 없이 질서와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강변했던 것이지요. 당신이나 잘 믿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평을 하는 자는 필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이런 것입니다. 그 힘든 “모세의 율법”을 자신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요해 놓고서는, 지옥 불을 태울 쓰레기에 불과한 저 이방인들에게는 그저 아무 값없이 오직 은혜로 구원을 주신다고 하니(엡 2:8-9), 역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정의 자체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용돈 한 푼 주면서도 집안 청소를 시킨다든지 차를 씻게 하는 등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면서, 구걸하러 온 거지에게는 아무 군소리 없이 선뜻 거금을 던져주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불합리가 필자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아니 감동시켰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참석한 성경 공부에서 필자는 다음 구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바로 그 놀고먹는 회사 직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챙겨주는 사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필자가 그 부부와 논쟁하며 씨름하던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고 따지던 그 일이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수긍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하나님의 불합리와 불공정(不公正)과 불의(不義)가 이번에는 “은혜”라고 하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결국 필자와 필자의 아내는 그 부부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모습은 우리 가슴속에 늘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이런 불합리나 불공정한 처사는 바로 잡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비난을 듣지 않을 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만일 채권자(債權者)가 채무자(債務者)의 빚을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제 삼자로 하여금 대신 빚을 갚게 한다면, 공정한 처사가 아닐 것입니다.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의 편에서야 한량없이 고마운 노릇이지만, 빚을 대신 떠안게 된 제 삼자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빚을 갚아야 하며, 빚을 변제해 줄 요량이라면 그냥 해 주면 될 것이지 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느냐 이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채권자가 정말 공평무사(公平無私)하려면 자신이 직접 그 빚을 떠안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빚을 갚게 하느라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신 떠맡게 하신다면, 우리야 고마운 일이지만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이 예수님이 되는 방식을 통해서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을 해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심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self-substitution),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만족에 대한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충분하고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 자신뿐임을 안다면, 어느 누구도 그분이 일하신 방식에 대해서 불평과 항의를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칼빈’(J. Calvin)은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irresitable grace)라고 말합니다. 이제 ‘다말’과 관련해서 이전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해 봅시다: “어떻게 거룩한 예수님의 족보에 ‘다말’과 같은 패륜아가 포함될 수 있을까? 어떻게 지옥의 불쏘시개에 불과한 이방인이 포함될 수 있을까? 어떻게 남자도 아닌 여자가 포함될 수 있을까? 어떻게 시아비와 며느리의 불륜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가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될 수 있을까?”
이 족보는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 더럽고 추악합니다. 이 족보의 색깔은 백로(白鷺)의 순백이 아니라, 까마귀의 검정색입니다. 우리의 옛 시인은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만, 이 두 색은 전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백로의 역설은 그가 까마귀 곁에 있을 때 더욱 빛나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법이 많은 곳에 구속과 처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속과 처벌이 많은 곳에 사면과 용서는 더욱 큰 빛을 발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족보는 희망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이 족보 속에 원하기만 한다면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여인이나, 죄인이나, 파렴치한이나, 패륜아나 구분이 없습니다. 그 족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 족보는 또한 도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그분의 백성에게 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도 아니고,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신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무엇에 대한 도전입니까? 자만(自慢)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했으며, 그들의 월급은 노동에 대한 당연한 대가였으므로 사장님에게 전혀 미안할 것도 감사할 것도 없는 모범 직원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버지의 엄청난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며, 집나가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생과는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장남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세상 어누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기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당연히 이런 나를 축복하고 유산을 물려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도전입니다. 양식(良識)과 지성을 가지고 윤리∙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필자에 대한 도전입니다.
또 다른 도전은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족보는 절망과 두려움에 대한 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모범 시민에게는 사면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자에게는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깊이 체험해 본 자라야만, 희망을 바라고 구원을 고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왜 그분이 필요하십니까? 고백해 봅시다.
연습과 토의
1.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요셉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전후 에피소드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본문의 문학∙신학적인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유다’를 ‘요셉’과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 차이나 공통점이 있을까요?
3. 당신은 ‘다말’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4. 나도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다면, 나의 영적 부모는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나의 영적 자식은 누구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