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인과 아벨
김태정 목사창세기 3:14약 14분 분량
한 때 유행하던 TV 광고 문구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광고 문구라기보다는 차라리 잠언에 더 가깝다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담’ 부부나 ‘가인’에게도 이 잠언을 적용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가인’도 과연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첫 번째 인류가 되었던 것일까?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해서 “저주”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참고. 4:11). 이전에 하나님께서 뱀을 향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3:14), 그리고 땅에 대해서도 또 한 번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즉 땅이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두 사람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참고. 3:17).
하지만 사람을 향해서 저주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신 것은 ‘가인’의 경우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래저래 ‘가인’은 기록의 사나이입니다.
가인의 형벌. 그가 받은 저주는 죽을 때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1절하-12절).
‘가인’의 저주는 그의 부모가 받은 것에 비하면 심각한 발전이며, 이 저주 속에 포함된 일련의 선언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땅이 더 이상 효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이미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었지만, ‘가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땅이 그를 추방하고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화법(擬人化法)을 사용해서 땅의 부르짖음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나를 경작하여 나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으면서 그 보상으로 내게 준 것은 동생의 피가 아니었소! 나도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내 소산을 줄 수가 없소.”
땅이 그를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과 그는 원래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원래 “땅의 티끌”에서 탄생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 역시 그러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거부당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고아원에 내다 버리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추방당하는 선지자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한 개인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죽음을 말합니다. ‘가인’이 지금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암시입니다. 그는 앞으로 평생을 가정도, 고향도, 공동체도, 국적도 없이 정처 없이 외톨이로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인생은 그야말로 나그네 길이 될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학교에서 “왕따”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청소년 학생들의 수가 연간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회적 죽음은 곧 개인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며, 종국에는 육체적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인’이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가 지나치게 무겁고 가혹하다며, 하나님에게 대드는 모습을 통해서도 ‘가인’의 저주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에서 구차스러운 삶을 연명해가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그 땅이 그들을 내쫒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땅을 혹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식일도, 안식년도, 희년도 없이 오직 일, 일만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금 그는 하나님이 없는 이곳 ‘바벨론’ 강가에 앉아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던 그 황홀한 예배, 그 영광과 약속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지금 그는 ‘블레셋’ 인들의 잔치에 노리개 감으로 초대된 맹인 ‘삼손’의 처지처럼 되었다는 것이지요.
가인의 예배. 도대체 무슨 연고로 ‘가인’은 이토록 혹독한 판결을 받게 된 것입니까? 도대체 무슨 선택을 잘못 했던 것일까? 무슨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하나님에게 드린 예배가 문제였습니다. 무슨 살인이나, 간음이나, 거짓말 등과 같은 범죄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가 비극의 사단(事端)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까!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지요. 다른 일도 아니고 예배 때문이라니! 박수치고, 노래하며, 기도하고, 축도하는 자리에서 저주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행여나 ‘가인’이 빈손으로 나왔다고 그럽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온갖 아름답고 풍성한 과일과 곡식들을 다 가지고 나온 것이에요! 이런 사람의 예배를 거들떠보지도 않다니요!
‘가인’의 기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화면을 되돌려봅시다. 한 해의 끝에 두 형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제사를 드립니다. 두 사람이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것입니다. 농부인 ‘가인’은 땅의 곡식을, 목자인 ‘아벨’은 양과 그 기름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거부하고 ‘아벨’의 것만 받으십니다. 이에 ‘가인’은 격분합니다.
나라도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예배만 받아들이고 내 것은 받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호의(好意)를 무시당하는 것만큼 더한 모멸감이나 분노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건 속말로 뭐주고 뺨맞은 정도가 아닙니다. 누가 이런 고약하고 심술궂고 편파적인 신(神)에게 예배를 드리고 싶겠습니까! 누가 그를 섬기고 존경하고 싶겠습니까! ‘야곱’의 자식들이 왜 그들의 애비를 알기를 우습게 알았습니까? 편애(偏愛)였습니다.
“그래서 섭섭합니다. 화가 납니다.” 가인이 이렇게 불만을 드러냈더니(5절), 하나님은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꾸짖는 것이에요(6절).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주일날 만사(萬事)를 제쳐두고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설교자가 격려는커녕 되레 야단을 치는 것이에요. 저주에 가까운 설교를 나에게 막 퍼붓는 것입니다. 아, 교회 나와 준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판에 나에게 야단을 쳐? 야단을 치려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해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령 무엇인가 잘못했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야지. 예컨대, 잘못되었으니 다시 하라든지 말이지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가인’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어 보입니다만. 하지만 그에게는 두 번째 기회도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비정하고, 쌀쌀하고, 불 같이 화를 잘 내는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분의 평소 성격이나 기질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제사장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한 번 잘못 드렸다 죽음을 자초했습니다(참고. 레 10:1-2). 예배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습니까?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성령 충만하게 되자(행 4:32),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이에 질 새라, 소유를 팔아 그 중의 일부를 교회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오, 통재라! 그중 일부를 자신들의 것으로 감추었다는 이유로 다른 곳도 아닌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참고. 행 5:1-11). 도대체 이런 끔찍하고도 억울한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바보들 같으니라고, 차라리 처음부터 내어놓지를 말지.”
이 사람들에 비하면 ‘가인’은 그나마 다행인 것입니다. 최소한 죽음은 면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항변할 기회도 갖지 않았습니까! ‘나답’과 ‘아비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러한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평생을 결정지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가인의 선택.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가인’의 예배를 거부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농부가 아니라 목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혹자는 말합니다. 사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도록 명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창 2:15).
그렇다면 ‘가인’이 드리는 제물에 문제가 있었을까? 혹자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곡식보다는 짐승과 그 피의 제물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발상은 다분히 후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를 염두에 두고 나온 것입니다. 즉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레위기>의 규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일부 속죄와 관련한 제사는 짐승을 희생 제물로 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제사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자원제”로 드리는 제물 중에는 소제, 즉 곡식제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드린 제물이 문제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우리는 “거룩한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화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본문과 <신약> 한 곳을 참고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우리는 여기서 ‘아벨’의 믿음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자발적인 동기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면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가 억지로 제물을 드렸단 말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가인’의 시대에 무슨 의무적인 제사 규례 같은 것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 역시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렸으면 됐지 또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차이는 아마도 그들이 드리는 제물의 질(質)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가인’의 예물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아벨’의 예물을 상세하게 보여줌으로써 무언중에 두 종류의 예배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아벨’이 드린 예물이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4절). 즉 ‘아벨’은 짐승들 중의 첫 번째와, 그 짐승의 가장 맛있는 부분인 기름 부위, 즉 최상의 것을 드렸다는 암시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결코 우연이랄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아들 ‘가인’이 첫 소산을 드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째 아들 ‘아벨’이 그 첫 새끼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특별히 첫 태생은 짐승이든, 곡식이든, 열매든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다만 그 첫 태생이 사람일 경우에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속’(代贖; redemp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출애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참고. 출 22:28-29; 34:19-20). 즉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의 죽음의 대가로 “출애굽”이라는 구속을 받았습니다(참고. 출 13:2, 12-15; 4:22). 그렇다면 ‘가인’은 하나님의 장자(長子)로서, 자기를 대신할 짐승의 첫 태생을 드려야 했던 것이나, 오히려 둘째인 ‘아벨’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구한 역설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가인’에게 하나님은 두 번째 선택이었다는 것이지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 것이 아니라, 내 나라와 내 유익을 먼저 구했다고 할까요?
이뿐 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은 결코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레 1:3; 20:20-22).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사지(四肢)가 온전하지 못한 것들은 다 제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일년생 양의 가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 ‘아담’ 즉 이스라엘의 장자 예수님은 왜 인생의 황금기 즉 청년의 시기에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렸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까? 왜 우리는 한 주일의 첫날을 “주의 날”(the Lord's day)로 기념합니까? 왜 교회는 청소년 선교를 그 중요한 사역으로 삼아야 합니까?
‘아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해주셨기 때문에 드리는 단순한 감사의 예배 이상의 헌신이요, 결단입니다. ‘아벨’의 ‘헤세드’가 빛나는 장면입니다. 즉 그는 둘째 아들로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인’처럼 ‘나실’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의 첫 새끼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룻’처럼 안 해도 될 일을 했습니다. ‘룻’의 동서(同壻) ‘오르바’의 선택을 우리는 결코 나무라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희망 없는 미래에 누가 투자를 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오르바’의 선택은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오르바’의 선택이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었다면, ‘룻’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룻’은 “운명이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꾸지 않는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번 양보해서 ‘가인’의 선택을 ‘오르바’의 선택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한다 해도, ‘아벨’의 선택은 ‘룻’의 그것처럼 탁월하고 위대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가인’이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렸다면, ‘아벨’은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을 드렸습니다. ‘가인’이 쓰고 남은 것을 드렸다면, ‘아벨’은 최상의 것을 따로 떼어놓았습니다. ‘가인’이 자기의 소유를 드렸다면, ‘아벨’은 자신을 드렸습니다.
습관의 중력. 두 사람의 예배에 왜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어쩌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이번 한 번만 그랬을까? ‘가인’이 너무 바빴던 것일까? 그 해 특별히 소출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잘 해 왔는데, 이번만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일까?
서양 격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품이 되며, 성품은 운명이 된다.” 모든 올림픽 종목이 지속적인 반복 훈련을 필요로 하지만, 특히 체조 경기나 피겨 스케이팅 등은 뼈를 깎는 반복 연습을 요구합니다. 이들 선수들은 습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글을 잘 하는 것은 타고날 때부터 한글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봉사활동이나 기부도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나 설교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예배는 평소 습관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날 예배에서 ‘가인’의 모습은 평소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그의 모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날도 그의 습관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충실하게 ‘가인’의 평소 모습을 드러내주었습니다. ‘가인’은 매일 매 순간 습관이 시키는 대로 선택했고, 그렇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자연이 그를 선택한 것도, 운명이 그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냅니까? 주일 예배를 대하는 내 모습은 어떠합니까? 회중 앞에 나와 공적 기도를 드리는 내 내면 세계는 어떠합니까? 혹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런 저런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횡설수설 내지는 중언부언하지는 않습니까? 설교가 듣기에 부담이 되고 거북하지 않습니까? 헌신과 결단의 초청을 들을 때마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계속 무시하며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지는 않습니까?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작정입니까? 언제까지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요량입니까?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체질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결단의 순간입니다. 나오셔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습니다. 다음 주 예배도 없습니다. 그것은 환상이나 희망 속에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을 얻을 때인 것이지요. 집나간 작은 아들처럼 분연히 차고 일어나야합니다: “그래, 지금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내가 다시는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돌아가듯 하지 않겠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헌신을 요구하시면서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탁월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귐을 갖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유진 피터슨). 주님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로 가라”고 초청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가니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따라가는 그 넓은 길이 아니라, 대부분 가려 하지 않는 그 길 말입니다. 그 길은 외롭고 위험할 수도 있지만, 시시하고 쩨쩨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실로 위대하고 탁월한 길인 것입니다.
탁월해지고 싶습니까? 지금 당장 헌신하십시요! 할렐루야!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