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6과
제 16과: 개인적 호소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4:12-5:12약 23분 분량
제 3 부
요 청
A. 권면(I)
유대주의에 대하여
(4:12-5:12)
<갈라디아서>에서 제 3부의 시작, 즉 “권면”이 어디서 시작되는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논란이 많은 이유는 4장 이후 권면으로 볼 수 있는 명령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예: 4:12, 4:21, 4:31, 5:1, 5:2, 5:7, 5:13 등).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신의 제 2부는 4:12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이 구절에서 사도의 첫 명령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사실 4장에만 이 외에도 “사라와 하갈”의 우화를 소개하면서 네 번의 명령문이 더 나타나고 있습니다(4:27, 30). 이 중 처음 세 번의 명령은 “즐거워하라”, “외쳐라”, 그리고 “소리 질러라”인데 모두 <이사야서>(54:1)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로서 <창세기>(21:10)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네 번의 명령 중에서 네 번째야 말로 본 서신의 신학적 배경이나 주제에 걸 맞는 명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로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5:1-6:10) 명령과 권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명령(5:1, 13, 14, 16, 6:1, 2, 6, 7); (2) 권면(5:25, 26; 6:9, 10). 따라서 4:12-6:10 전체를 서신의 권면 부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본 교재의 <서론>에서 다룬 바 있듯이, ‘갈라디아’ 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은 이중적입니다. 그 하나는 “율법주의”와 “명목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방임주의”(또는 “율법폐기론”)입니다. 전자(前者)가 “유대주의”라는 외부의 적이라면, 후자(後者)는 보다 교묘한 것으로서 교회의 태동기부터 잠재해 있었던 내부의 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려는 시도라면, 후자(後者)는 그 자유를 개인의 탐욕을 위한 무책임한 “방임주의”로 몰아가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 이 두 무리가 별도로 존재하면서 교회를 위협했다기보다는, 교회 전체가 이들 잘못된 신학적 교리에 의해 어느 한 쪽으로 휩쓸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컨대, “유대주의”의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교회를 향해서 마치 모든 교인들이 다 그러하다는 듯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인이여”(3:1)라고 꾸짖고 있는가 하면, “자유방임주의”에 대해서도 “형제들아”(6:1)하고 부르면서 마치 교회 전체가 그런 위험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서신의 권면은 크게 이들 두 오류에 대한 지침과 훈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에 따라 다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권면 I(4:12-5:12): “유대주의”에 대한 경고와 권면
(2) 권면 II(5:13-6:10): “율법폐기론”에 대한 경고와 권면
제 2부의 4:12-5:12 본문은 형식 상 제 1부의 16-4:11 본문과 일종의 시적 유사 병행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관찰이 될 것입니다:
(1) 사도 자신의 자전적(自傳的) 호소로 시작함: 4:12-20; 1:13-2:14
(2) <구약> 본문에 대한 자의적 해석: “사라와 하갈 이야기”(4:21-31)와 “아브라함 이야기”(3:6-18)
(3) 신자의 자유에 관한 결론과 권면: 5:1-12; 2:15-21 및 3:1-4:11
제 2부의 나머지 단락(5:13-6:10)에 대한 해설은 추후 해당 본문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16
개인적 호소
(4:12-20)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절).
문학과 역사
본문의 분위기 내지는 사도의 기분을 묘사할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격정과 감정”, “비이성적”, “불합리” 등등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분석이 어려울 정도로 사도의 개인적 감정이 심하게 유입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 주석가의 말대로 사도는 이곳에서 모든 이성적 논의를 잠시 접어두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호소 및 간구와 함께 자신의 숨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Burton). 그런 점에서 본문의 분위기는 직전 단락(4:8-11)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 이르러 감정이 북받쳐 자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린 듯합니다(Mussner). 백번 양보해서 본문에 담긴 내용이 그 자체로서 불합리하거나 일관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처럼 서신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역시 서신의 일종으로서 당시 ‘헬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서신이 보여주고 있는 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당시 사회에서는 서신이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하여 개인적이고 감정이 실린 내용들을 도입하면서 그 분위기를 조절하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합니다. 본 서신의 제 2부에서 보여주었던 내용이 지나치게 신학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사도 자신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사도의 격정과 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현대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당시의 상황도 이런저런 암시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비합리적이라거나 또는 사도의 개인적인 감정이 비정상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그는 이곳에서 서신의 국면, 즉 “견책”에서 “권면”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가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과 맺었던 관계를 회상시키면서 지금 그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관계와 대조시키는 방식으로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새로운 출발점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로 “나처럼 되라”(4:12)입니다.
사도는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그의 수신자들을 방문할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롬 15:14-32; 고전 16:1-18; 빌 2:19-30). 이곳에서는 20절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4:20). 그러나 이곳에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엄밀하게 이 구절은 다른 서신에서 밝히고 있는 방문 계획과는 그 동기가 분명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 서신에서는 다른 곳에서처럼 공식적으로 이에 해당하는 단락이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신학과 신앙
1. 권고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서신의 제 3부는 사도의 신학적 논쟁이나 설교가 아니라, 개인적 호소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전에 맺었던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의 사랑과 충성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싸움이 아니라 간구와 호소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권하노니(12절상)
사도는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로 부르면서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사 “권하다”(devomai, 데오마이)는 그 자체로서 “정중하게 요청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곳에서는 친밀한 호칭, “형제들아”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간절한 요청 내지는 부탁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요청하는 내용인 즉은 제 3부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는 권면 내용이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서신의 제 3부에 대한 표제어(caption)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가 주는 첫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절상)
즉 “나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그 자체로서 오해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독자들은 사도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처럼 산다는 것은 이전의 잘못된 모든 관계를 끊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와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관계로 출발을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대교에서 요구하는 절기와 제사와 할례와 음식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생활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착각하며 다시 그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이들은 사도가 걷고 있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배교의 상태로 돌아버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언급은 사도나 이들 교인이나 한 때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애매모호하여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 본문에 따르면 아무런 동사도 없이 단순한 부사구 “내가 너희처럼”(κἀϒὼ ὡς ὑμεἷς, 카고 호스 휘메이스)이 됩니다. 이 구절이 “나와 같이 되라”는 주절(主節)에 대한 부사구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의미가 통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절(主節)에서와 같은 동사인 “되다”(become) 또는 “이다”(be)를 임의로 삽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동사의 시제(時制)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는 이 구절이 과거 사도의 행동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동사 “되다”의 과거형 또는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s I have become like you(are)”; “As I became like you(are).”
즉 이 구절이 사도의 현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과거의 행동을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전후 문맥을 볼 때, 이 구절은 사도가 이전에 취했던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즉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방인과 동일시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동기는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내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22).
그런데 12절은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로 또 한 번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12절하)
앞에서 사도의 관심사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현재 자신처럼 되는 것인데, 느닷없이 과거의 경험으로 교인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처음 그들이 함께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없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그래서 이 구절의 의미 또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몇 가지 가능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전에는 나를 해롭게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원수처럼 대하고 있다”(16절 참고); (2) “너희가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나 하나님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1:6 참고)”; (3) “너희가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던지 알 길은 없으나, 이 구절이 주는 인상은 지금 사도와 ‘갈라디아’ 교인들은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2. 회상
이어지는 세절에서 이들 사이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도가 이들에게 지난 일을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 15절). 사도가 상기시켜주는 첫 번째 기억은 다음과 같습니다: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3-14절)
이처럼 “너희도 아는 바라”(13절) 또는 “내가 증언 하노니”(15절) 등과 같이 과거의 사실을 회상시켜주는 언급이 “나처럼 되라”는 명령이나 권면에 곧바로 이어 등장하는 일은 사도의 서신에서는 이례적인 것은 아닙니다(참고, 고전 16:15; 살전 4:1-2). ‘갈라디아’ 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란 무엇입니까? 이전에 ‘바울’이 그곳에서 전도 여행을 할 당시 그들과 누렸던 그 아름답고 즐거운 관계를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δι ʹ ἀσθένειαν, 디아 아스데네이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육체의 연약함”은 분명 어떤 형태의 질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추측컨대 이 질병은 그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수없이 많은 수난들, 즉 감옥 생활이나, 뭇매나, 여러 번의 죽을 고비, 공회나 로마 당국으로부터 받은 여러 번의 태장(笞杖)에서 얻은 결과였을 것입니다(참고. 고후 11:23-25). 또는 그가 말하는 “육체의 가시”(고후 12:7-10)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그가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과연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자신이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이 질병이 ‘갈라디아’ 지역 선교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가 ‘갈라디아’ 지역을 첫 선교지로 삼은 것이 이 질병 때문이었다는 것인지, 또는 몸이 약하여 다른 지방으로 갈 계획을 취소하고 원래 계획보다 더 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 선교에서 병을 얻어 휴식과 회복을 위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말인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이었든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는 실은 모든 것, 모든 상황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십분 활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F. Mussner).
사도는 14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과 누렸던 그 아름다운 관계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그러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내 육체에 있는 너희의 유혹”(your temptation in my flesh)이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이 됩니다만, 그 뜻은 분명합니다. 즉 사도가 가졌던 질병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 그를 배척하거나 경멸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인데도, 오히려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자신도 그의 질병을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한 마당에(고후 12:7), 이들이 이를 개의치 않고 사도를 이처럼 맞이해 주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차원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천사나 ‘그리스도 예수’를 대하듯 했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천사라든가 또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의 가슴을 향한 수사적 과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의 증언과 회상(回想)은 계속됩니다. 교인들을 향한 두 번째 기억인 셈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절)
그의 두 번째 증언은 수사적 질문과 함께 시작하면서, 이전에 그들이 누렸던 관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수사적 질문은 한 마디로 “너희가 이전에 누리던 그 축복(행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이라도 빼 줄” 정도의 관계였다는 것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간이라도 빼 줄” 정도였다는 것인데, 이 역시 최상의 수사적 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진단
이처럼 더 이상 친밀할 수 없었던 그 관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
이것이 사도가 내리는 첫 번째 진단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것이지요. 여기서 접속사 “그런즉”이 기능하는 바는 원래 하나의 독립 절을 이끌며 유추나 앞선 논지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역본에서 이 문장을 수사적 질문의 형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역성경>에서도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분노에 찬 탄식 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원수가 된 것 같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에게 보여주고 있는 태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13-15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름답던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은 갑자기 중단되어버렸습니다.
그의 분노에 찬 두 번째 진단은 이제 “그들” 즉 “유대주의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17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7-18절)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두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절에서 세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동사는 “열심내다”(ζηλόω, 젤로오)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누군가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분투하다”, “투기하다” 등입니다.
사도는 누구든, 무엇에든, 열심을 내는 것 자체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그런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18절). 따라서 혹시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교인들의 호의를 얻고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 동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이간시키기 위함”(ἐκκλείω, 엑클레이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궁극적으로는 사도의 지도력을 거부하게 하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통제를 받게 하겠다는 것이 그 동기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진단은 사도 자신의 진정한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19-20절)
이 마지막 진단에서 다시 한 번 갑자기 그 톤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진단에서 “유대주의자”들을 대할 때의 태도와는 당연히 다른 것입니다. 분노와 반대로 일관하던 모습에서 애틋한 사랑과 염려와 그리고 당혹감이 함께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1) “나의 자녀들아”; (2) “다시...해산하는 수고를”; (3)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사도는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τέκνα μου, 테크나 무)하고 부릅니다(고전 4:14, 17; 고후 6:13; 12:14; 살전 2:7, 11; 빌 10). 교인들을 향한 그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해산하는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19절의 상징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사도가 자신을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산모”로 묘사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도 “그리스도라는 배아를 자궁 속에 잉태하여 그것이 자라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가 기독교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라든지(롬 8:29), 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빌 3:10)라고 한 적은 있습니다만,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표현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그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과는 상반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서”이든 “그리스도 안에서”이든 모두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밀접한 인격적 관계를 말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제 사도가 처음도 아니고 “다시” 해산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초보와 기본 진리를 다시 가르쳐야 할 정도의 필요성에 놓여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마지막으로 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으로 자가 진단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심경과 함께 희망 사항도 밝히고 있습니다만, 이 희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편지는 발신자의 존재를 대신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사도 역시 ‘갈라디아’ 교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그들과 함께 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희망은 18절에서도 밝힌 바 있어, 대리자나 또는 편지의 전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감정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실망과 당혹스러움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처럼 서신의 제 2부의 벽두에서 위기에 빠진 교인들을 향하여 권면과 호소와 진단으로 시작하였다가 그들을 향한 실망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이제 곧바로 ‘하갈과 사라’에 관한 우화적 해석을 시작으로(4:21-31), 복음 안에서 그들이 누리는 자유에 대한 강론으로(5:1-12) 직접적인 권면에 몰입하게 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권고. 이 세상 어느 누가 “나처럼 살아라”고 감히 충고할 수 있겠습니까? 신화 속의 ‘나르시스’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가 이 정도라면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종종 이런 충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한 예로써,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빌 3:17). 과연 이 충고가 사도로서 그의 신학적 지식에 대한 우월감이나 또는 초인적인 선교 사역에 대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아는 사람도 없다는 확신 가운데서 나온 것일까요?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빌립보’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영통하는 지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무리가 또 있었습니다. 사도가 “할례당”으로 부르던 무리 즉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전히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14). 그래서 그는 “누구든지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자라면 마땅히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충고는 자랑이나 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불가지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학이나 신앙적 확신이 지나치면 이처럼 교회나 세상에 대해서 도움보다는 폐해가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도 같은 심정으로 같은 충고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역시 명령이나 충고라기보다는 호소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방대한 신학적 지식을 갖춘 머리만 가진 학자요 사도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비이성적이 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는 교인들을 “형제”로 부르는가 하면(12절), “나의 자녀들”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19절). 이 호칭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심지어 스스로를 그들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19절).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를 교인들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비슷한 뜻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왕은 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할 때, 사도는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행 26:28, 29). 그가 왕에게 말한 것은 달리 표현하면,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이 죄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소원은 비단 사도가 그의 교인들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다른 불신자들에게 가져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는 자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에 살던 이방인들이 그와 같은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그들과 동일 시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서신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0-22).
신학이나 신앙적 확신이 지나친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선교나 전도의 목표가 다른 사람을 우리와 같이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먼저 우리가 그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끌어올리기도 힘든데, 내가 내려가는 것은 실은 더욱 힘든 노릇이기에 사도의 이 말은 정말이지 우리를 거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전도하기 위하여 그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해 본 적이 있을까?
회상.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바가 “이해받고 싶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과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전에는 서로를 이처럼 이해하고 용납해 주던 때가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처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 즉 “육체의 연약함으로” 그 지역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에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정도의 “육체의 가시”를 사도가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사도는 자신의 질병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육체에 심어놓은 가시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아파본 사람이 아파하는 자의 심정을 잘 안다고 합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이 그를 겸손하게 한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일까요?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들의 편에서, 그들의 처지에 서서, 이해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나 나의 간증이 이 사람들을 격려하기 보다는 넘어뜨리고 좌절케 하지는 않을까?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은혜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거부하고 배척할 정도로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질병 또한 함께 받았다는 사실도 전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에게 절기예배나, 십일조나, 새벽기도나, 철야예배를 강요할 수는 없겠지.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 우리네 속어처럼 사도는 추측컨대 그런 심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은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사도를 배척하고 경멸하기보다는 오히려 측은히 여기고 용납해 주었습니다. <잠언서>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갈라디아’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낮아지는 사도를 오히려 높여 그를 하나님의 천사인양, 그리스도 그 자체인양 사랑하고 받들어주었습니다. 분네 넘치는 예우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진단.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 이들은 사도를 마치 원수 대하듯 합니다. 사도가 올바른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했을 때 천사처럼 대하던 그들이 이제는 원수처럼 대하고 있으니,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변덕스럽고 간사한 것인가 봅니다.
이들이 이렇게 돌변한 것은 가만히 들어와 감언이설로 꾀는 자들 때문입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와 죽마고우(竹馬故友)는 버리는 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를 버리고 첩이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동기도 모른 채 말입니다. 대개 새로 들어온 자들의 동기는 한 가지입니다. 첩은 돈을 바라고, 새 친구는 오래 된 사랑을 훔치려 듭니다. ‘압살롬’이 그의 아비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을 훔치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인도 자신의 목회자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할 때, 이단들의 가르침이 달콤하게 들립니다. 필자 역시 필자가 인도하는 성경 공부에 다른 교회 교인들이 간혹 와서 은혜를 받았다며 좋아할 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교인의 수평이동을 필자가 스스로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처럼 말입니다. 필자 때문에 그가 속한 교회의 목자를 비난하거나 혐오하게 되면, 나 자신이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셀 모임”이나 또는 “성경 학교”가 바라는 유일한 목적이나 동기가 있다면, 사도가 자신에 대해서 진단하고 있는바 진정한 동기 그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기존 교인이 우리의 모임이나 학교에 참석한다 할지라도, 그를 자신이 속한 교회에 돌아가서 그 교회를 섬기는 것을 돕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넓게는 지금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해산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시 어머니가 되어 해산하는 수고를 거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각 사람을 가르쳐 그 또한 가르치는 자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에서 사도의 심정을 느끼게 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음미해 봅시다.
2. 본문의 분위기나 톤은 어떤 것입니까?
3. <우리 교회>의 “셀 모임”이나 “성경 학교”의 진정한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