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4과
명목주의 반박(3): 새 관계의 예시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4:1-7약 27분 분량
제 14과: 명목주의 반박(3)
14
명목주의 반박(3):
새 관계의 예시
(4:1-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
앞 단락의 주제나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는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됨이나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었습니다. 사회, 문화적으로 새로운 관계가 뜻하는 바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그리고 “종이나 자유자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과 동일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본문에서 이 새로운 관계에 대한 설명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의 유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유비의 출처나 역사가 분명치는 않으나, 그것이 전하려는 의도 즉 어떻게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단순 명료홥니다. 본문의 구조도 이런 유비를 중심으로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유비; (2) 유비의 적용; (3) 유비의 결론.
본문 전체를 통해서 유비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한 쌍의 핵심어는 “종과 아들”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지, 왜 혼용되어서는 안 되는지 등에 관한 이해가 독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의 문학적인 기능은 하나의 유비(analogy) 또는 예시(illustration)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 예시란 명문 가문에서 유업을 이을 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이 장성하면 가문과 유업을 잇게 될 것이지만, 그 때까지는 마치 종처럼 보호와 감독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 아래에서” 어린아이처럼 살다가(3:23-25)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3:26-29) 성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은 3:23-26에서 다루고 있는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하나의 쉬운 예를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본문의 기능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용어라든지 비유의 배경이나 출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본문의 구조조차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본문의 1-2절 사이에 등장하고 있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유업을 이을 자”, “어린아이”, “주인”, “후견인”, “청지기” 등이 모두 법률 용어들로서, 특히 사도가 2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다”는 표현은 과연 어떤 법제도 하에서 시행되던 규정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의 법체계에서 따온 것인지, ‘로마’나 또는 ‘그리스’시대 단독의 법체계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셈’ 계열의 법제도에서 원용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초등학문”(3절)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아들의 명분” 즉 “양자 삼기”가 5절과 7절에서 각기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 간결하고도 힘찬 형식이나 내용적 특징 때문에 일종의 “선포”(케리그마)로 보는 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두 구절 안에 교차대구 형식으로 이루어진 “파송”과 관련한 내용도 있어, “파송 문구”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때가 차매”라든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등과 같은 표현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지 않은 표현이며, 오히려 초기 유대 기독교인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의 출처나 기원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 표현이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사도가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메섹’에서 그가 직접 체험한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이라는 신앙 고백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는 것인지 단언할 수 있는 근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본문의 기원이나 출처 그리고 본문 내의 여러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예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전체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으로 미 성숙아였을 때는 모세의 율법의 보호와 관찰 아래 살아야 했으나, 이제 아버지가 정한 때가 차서 ‘그리스도’가 온 이후로는 “율법 아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유비(1-2절)
사도는 앞의 두 단락에서(3:19-25; 26-29) 율법의 목적과 기능을 논하면서 “율법 아래 사는 삶” 이 무엇이며(3:26-25),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가 무엇인지(3:26-29)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단락에서는 이 두 주제를 하나의 유비를 통해서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비란 “유업을 이을 자”(상속자)에 관한 것으로서 이 단어는 이미 직전의 구절에서(3: 29) 등장한 바 있습니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1-2절)
이 구절에 따르면, 아들은 법적으로는 “유업을 이을 자”이며, 따라서 가정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한 소유주 즉 “어린 주인”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직 “어린 아이”이며, 노예와 다를 바 없습니다. 명문대가의 상속자를 어린 아이 취급하는 것에 대해서 다소 불쾌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게 있겠으나, 이 유비가 보여주고 있는 바는 가족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즐거움 기분을 갖게 합니
<신약>에서 “어린아이”는 문자적으로는 뜻 그대로 “어린 아이”이지만(마 21:16),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11:25; 눅 10:21). 유대인 학자 ‘필로’는 이 단어를 “초보자” 또는 “덕목 훈련을 향한 순례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일반적으로 “미성숙한 신앙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고전 3:1; 13:11; 엡 4:14; 살 전 2:7; 히 5:13). 그러나 이곳에서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어린 아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 즉 “유업을 이을 자”, “어린 아이”, “주인”, “후견인”, “청지기” 등은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해하고 있는 바처럼 모두 법률적인 용어들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그 “어린 아이”가 “노예”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한 사도의 언급은 예시를 위한 일종의 과장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의 요점인 즉은, 이 둘은 어떤 형태로든 법이나 규율 아래 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무구나 이런 과정을 거쳐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유쾌한 것이었든 그 반대였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어려서 즉위할 경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치는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어린 왕도 분면 왕이긴 하지만 사회적 경험이나 성숙도에 있어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어린 주인”을 돌보고 감독하는 이를 “후견인”과 “청지기”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역할이나 기능과 관련해서 그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두 단어 공히 어린 아이를 보호하고 감독한다는 공통점은 있어 보입니다만, 그 정확한 용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도는 어디서 이런 유비를 가져온 것일까요? 이 두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사도가 아마 당시 ‘로마’에서 통용되고 있던 “양육법”이나 또는 “양육 계약”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들 법에 따르면 한집안의 상속자가 열네 살이 될 때까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임명한 “가정교사”의 감독 하에 두었다가, 그 이후 다시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집정관 위원회”와 같은 기관에서 임명한 “관리자” 내지는 “집정관”의 관리 하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더 오래된 제도를 염두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상당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법 제도라든지 또는 ‘셈족’ 계열의 배경을 갖는 제도 등을 말합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정확하게 어떤 법체계를 염두어 있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대의 상속법은 모두 한 결 같이 상속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유언자가 죽고 난 이후입니다. 사도에 따르면 본문에서 유언자는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죽음을 상정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위에서 소개한 바 있는 ‘로마법’에 따르면 상속자가 “가정교사”와 “집정관”의 감독이나 보호 하에 있는 기간과 시기가 정확하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전자(前者)는 유언자가 직접 임명할 수 있지만, 후자(候者)는 시 집정관의 최종 승인 하에 임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에서 사도가 예시하고 있는 바는 두 직분자 모두를 유언자인 아버지가 임명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혹자는 사도가 말하는 유산 상속에 관한 법률은 당시 보다는 오히려 후대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로 상속자의 나이에 대한 규정이나 감독관을 임명하는 방법이나 절차가 ‘로마법’과 ‘그리스 법’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가 들고 있는 이 유비를 밝히기 위해서 당시의 상속법에 근거해서 재구성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박에 없습니다. ‘로마’의 ‘져스틴’ 황제(주후 527-65)의 상속법만 하더라도 그의 재위 기간을 보드라도 ‘바울’보다 훨씬 이후에 제정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나 ‘셈족’의 유산 법들도 마찬가지로 사도 시대에 비해 오백 년 뒤에 제정된 것들입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사도의 비유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이들 법 어느 것과도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1) 유산 상속의 시기나 감독의 기간과 관련해서 막연하게 “아버지가 정한 때”라고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 (2) 유산 상속의 시기나 감독의 기간과 관련해서 막연하게 “아버지가 정한 때”라고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 (3) “후견인”과 “청지기”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따라서 사도가 2절에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다”고 말할 때 정확히 그가 어떤 법 제도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어떤 법제도를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잇든지, 자신이 전하려는 의도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가 상징적이든 또는 실질적이든 간에 어떤 예시도 정확하게 그 상황이나 사건을 사실적으로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적용(3-5절)
유비의 궁극적인 목적은 적용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3절)
적용의 대상은 “우리”입니다. 사도는 <갈라디아서>의 여러 곳에서 이방인 기독교인을 향해서 “너희”라는 이인칭 복수형을 사용하다가 수시로 그 대상을 바꾸어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맥에 따라 “우리”는 ‘유대인’을 지칭하기도 하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하는 전체 기독교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1) “우리”가 혈통적인 ‘유대’인을 지칭하는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2:1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 하도다”(3:23-25). 한편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우리를 속량하셨으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이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3:13-14)
본문에서도 3-5절에서 혈통적인 ‘유대’인을 지칭하는 듯한 “우리”를 두 번 사용하였다가, 6-7절에서는 이방인을 포함하는 기독교인 전체로 그 의미를 확대한 다음, “너희”라는 단어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 하였다”는 표현은 3:23-25 사이에서 “초등교사” 관련한 표현과는 일종의 유사 반복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은 “기본 요소” 또는 “기본 원리”등을 뜻하는데, 사도는 이곳에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 단어의 의미를 기묘하게 뒤틀어 놓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성경 외의 다른 문헌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는 적어도 여섯 가지 정도가 알려져 있습니다: (1) 해시계의 바늘 또는 그림자; (2) 한 단어의 일부(문자나 음절), 알파벳의 문자들; (3) 우주의 성분 요소(즉 원소), 기본 성분, 기본 요소, 기본 원리; (4) 별이나 기타 천체들; (5) 신, 귀신, 천사 등과 같은 영적 존재들.
즉 그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올 때가지 자신의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기본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도가 “초등학문”에 “세상”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덧붙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만, 사도는 간혹 이 단어에 윤리적인 의미를 첨가하여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육적인” 또는 “세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5:13-26). <히브리서>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단어를 “성소”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히 9:2). 율법도 장막도 모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체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율법 아래서” 사는 것은 다시“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자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초등학문”을 율법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에는 율법의 저주와 감시 기능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사도는 이 표현을 이방인의 회심 이전의 삶과 관련해서도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9절). 이 경우에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세상의 풍습이나 철학, 종교나 미신 등을 총칭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나 구속 등과 관련하여 말할 때 종종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 고백이나 선언이나 선포 등을 인용하는 것을 봅니다(1:4;3:1,13,26, 27-28).이어지는 4-5절에서도 이들 고백이나 선포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송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절)
이 두절은 구조적으로 복잡합니다. 우선 4절은 종속절 “때가 차매”라는 종속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서 소위 “파송문”, 즉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파송문”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롬 8:3-4; 요 3:14-17; 요일 4:9-10). 그리고는 두 개의 분사구분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개의 부사절로 단락을 마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목적과 관련한 선언입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이 두 절은 일종의 교차대구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
B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B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A'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두 절에서 담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서, “때가 차매”라든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등과 같은 표현은 ‘바울’의 서신중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이중 두 번째 표현은 서신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상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이라는 표현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구조적으로도 4절의 교차대구적인 형식에서 보면 오히려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처럼 4-5절의 구조나 내용, 그리고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형의 등장 등으로 미루어 이 단락은 사도 자신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고백이나 선포에서 그 일부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유나 양자됨과 관련하여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 주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문장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4-절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그 출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Longeneker를 참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Longenecker, 166-170쪽.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4절 후반의 두 분사구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서 독특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첫 번째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그 특성에 관한 대표적인 선언입니다. 이 선언만으로 동정녀 탄생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표현은 인간으로 태어난 아이에 관한 상투적인 ”유대“식 표현으로 받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진정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임에 분명합니다. 두 번째 표현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독특한 선언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는, 그가 한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고, 율법의 저주를 죽음으로써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참고: 마 5:17-18; 갈 3:13; 빌 2:8).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왜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며, 율법 아래에서 태어났을까? 이어지는 5절에서 “…….하기 위하여”히나 로 시작되는 두 개의 부사절이 그 대답이 될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절). 일반적으로는 접속사 “히나”가 기능하는 바는 목적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코이네 그리스’(Koine Greek) 어법에서는 이 용례를 보다 확장시켜 목적과 결과를 동시에 드러내기도 합니다. 두 부사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내용을 보드라도 목적인지 결과인지 뚜렷이 구별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유대’ 사상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즉 목적)은 결과와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하시는 바를 다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적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목적이자 동시에 결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과 관련한 역설은, 하나님의 목적이 결과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대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 등장하고 있는 두 동사를 통해서도 이점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속량하다”:(2) “얻다” 즉 전자(前者)는 하나님의 목적이자 행위이며, 후자(後者)는 인간의 대응(믿음의 반응)으로서 결과 즉 목적의 성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반응으로 얻게 되는 결과는 “아들(양자 )의 명분”입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이나 <신약>에서<바울 서신>외에는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만,<바울 서신>에서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기독교인이 현재 누리고 있는 아들 됨(롬 8:15);(2) 기독교인이 미래에 가지게 될 부활의 육체(롬 8:23; (3) ‘이스라엘’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롬 9:4)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자들(엡 1:5). 사도 당시 ‘유대’교 진영에서나 ‘유대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사도 역시 이 동일한 단어를 기독교 복음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해해왔던 하나님과의 각별한 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결론(6-7절)
마지막 두 절은 본문 전체를 흐르는 “아들과 종”에 관한 유비의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보다 엄밀하게는 7절을 그 절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 사 아빠 아버지 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6-7절)
그러나 이 두 절은 본문의 나머지 구절들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검증 본문 전체(3:1-4:11)와도 그 연결이나 흐름이 어색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문학적 상수의 변화를 꼽을 수 있는데, 3-5절 사이에서 사용해오던 일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가 이곳에서 이인칭 복수 대명사 “너희”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일 수 도 있는데, “성령을 받은 일”과 “아들이 된 일”의 전후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사건 중에서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났는지를 따지는 일이 신학적으로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볼 일도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이 단락에서 두 사건을 등장시키고 있는 순서는 그동안 보다 넓은 맥락에서 이 두 사건을 다루고 있는 순서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동안 사도가 주장해 왔던 바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3:26)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에(3:2-5,14)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8:15-17에서도 이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6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즉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논지입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순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있어왔고, 교리적이고도 철학적인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당연히 그 입장도 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 이처럼 6-7절에서 연결이 부자연스러우며 어색하게 느껴질까? 두 가지 의문점 중에서 우선 첫 번째 것, 즉 수신자가 “우리”에서 “너희”로 바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를 담고 있는 4-5절의 본문은 그 출처가 사도 자신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인용 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 고백 문을 6-7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논지로 적용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과 관련해서 사도의 신학적 입장은 적어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 “성령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 사이에는 무슨 전후관계의 순서가 있기 보다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기독교인의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성격에 따라, 이 두 사건의 순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사도는 3장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휘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약속의 씨를 강조하면서 그 근거로 그들이 “성령을 받은 일” 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에 따르면 “성령을 받은 일”이 먼저 있었고, 그 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 6-7절에서는 같은 결론에 이르면서도 그에 이르는 논리 전개 과정이 정 반대입니다. 즉 이곳에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먼저 밝힌 후에, 성령이 이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 사이에는 무슨 전후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가 6절에서 “그 아들의 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이 표현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는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롬 8:9);“아들의 영”(롬 8:15; “주의 영”(고후 3:17);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
결국 이 두 표현은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그 순서가 어떠하든),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복합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가 성령을 강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만(참고3:2, 5, 14),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성령을 강조하는 목적이 어디 있을까요? 성령을 받으면 더 영적이 되거나 ‘카리스마’가 넘치기 때문입니까? 오늘날에도 이런 믿음이 여전히 교회 안에서 팽배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령의 역할은 “증거” 내지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란 ‘그리스도’의 행위로 가능하게 된 “아들 됨”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것을 교인들에게 증거하고 있는가 하면(3:2, 5), 이곳에서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우리의 편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쳐 부릅니다: “압바, 아버지!”
여기서 “압바,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새롭고도 친밀한 관계의 질적 수준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압바”(!Abba)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유래한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אב)의 강조형인 “아바”(אבא)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단어를 ‘그리스’어 “아버지”(pathvr, 파테르)와 함께 이중 언어로 구성된 일종의 복합어로 사용한 듯합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를 때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주 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호칭을 이전에 존재 했던 법적인 관계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7절에서 사도의 결론은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4:1-6절의 유비에 대한 결론일 뿐만 아니라, 앞 단락(3:26-29)에서 강조한 바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보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7절은 사도가 3장 이후 지금까지 제시해 온 모든 논의에 결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수신자를 “우리”에서 “너희”로 바꾸고 있는 것도 이 결론적인 선언이 미치는 영향이나 결과가 집단적인 체험에서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결론은 무엇입니까? “나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며, 그 자유를 누릴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지닌 자들입니다. 사도는 앞에서도(3:26) 이점을 분명하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그 믿음에 충실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7절의 결론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종과 아들의 차이에 관한 강조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 신분 모두에서 찾고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종과 아들은 상호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종은 종이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는가 하면, 타인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사도가 이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7절의 나머지 결론은 하나님의 유업에 관한 최종 선언입니다. 이 주제는 앞 단락(3:26-29)에서도 역시 마지막 결론으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누가 진정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인가? 아들인가 종인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같은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7장). 다만 본문에서 유업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는 표현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유비. 한 나라에서의 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地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 백성과 땅과 재물과 심지어 시간마저 그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려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는 동안에는 이 모든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법적으로 어린 왕도 분명 왕이긴 하지만 사회적 경험이나 성숙도에 있어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간섭이나 지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기의 명령을 받는 신하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한 가정에서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예가 실제 그 출처가 정확히 어디인지 분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추측컨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전통이나 관행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가 그려주는 유비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명문 가정의 미성년기의 상속자는 명목상으로는 모든 소유의 주인이지만, 아직은 그 모든 것을 누를 수 없습니다. “후견인”이나 “청지기”가 그의 인격은 물론 재산까지 관리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또 그를 지도하고 다스리기까지 합니다. 그는 규제 아래 있으며, 자유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종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가 정해 놓은 성인의 연령이 될 때까지 종의 신분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적용.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상속자들이지만, 아직은 미성년자아ㅔ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은커녕 율법의 감시와 굴레 아래 종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대소사 간에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감독과 지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마치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사도의 표현에 따르면 “약하고 천박한” 것이었습니다(9절. 그것이 “약하다”함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요, “천박하다”함은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J. Sttot). 즉 그것은 아무런 축복도 약속도 그 자체로서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는 주장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율법을 행하면 그것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유나 약속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E Peterson) 목사님이 지적한대로, 자유나 약속은 싸워서 “빼앗는”(take) 그 무엇이 아니라 단순히 얻거나 “받는”(receive)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자유는 그것을 쟁취하거나 빼앗으려 할 때 오히려 가진 자유마저 빼앗긴다는 역설을 <에덴 이야기>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누리지 않고 주지 않았던 자유를 “취하려고”(take) 하다가 모든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취하려고” 하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받는 기독교 성찬 예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E Peterson). 자유는 반항하거나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주는 자를 그냥 수동적으로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는 또한 자유에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때가 차매”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란 고대 사회에서 인정하는 일정한 나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는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자유에 행동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 즉 “구속”(redeem)의 행동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1세기 ‘그리스’에서 종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종이 부유한 자유인의 관심을 끌어 그 자유인이 종을 자유롭게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자유인은 성전이나 재단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그 종의 몸값을 지불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선언을 합니다: “아폴로 신이 주인으로부터 이 종을 사서……. 이제 자유롭다.” 그리고 제사장은 몸값을 이전 주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은 그 신분이 달라지는데, 이전에 그의 가치는 누구를 위해서 무인인가를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사람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누군가가 됨으로써 귀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E. Peterson).
그 관계란 우리가 하나님과 한 가족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끄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잇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친밀함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간혹 아버지로 부르기는 하지만, 가족 관계에서의 아버지, 또는 아빠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기도하실 때마다 일상 언어에서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그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고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마다 경직되고 공식적인 의례 관계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큰 실수를 저지를까 봐, 난처해질까 봐, 올바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령께서 아주 큰 소리로 외쳐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성령의 가장 초보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입니다.
결론. “나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며, 그 자유를 누릴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는 종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들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두 신분은 상호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종은 종이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는가 하면, 타인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가 이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누가 진정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입니까? 아들입니까 종입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같은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7상).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약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종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율법이 정해놓은 규범의 특 속에서 완벽주의를 지향하며 살기를 원합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명목론”에 반박하는 세 번째 검증으로서, 앞서 행한 두 번의 검증에 대한 예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시는 무엇이며,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2. 새로운 관계와 관련해서 성령의 역할이 소위 영적 은사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말해 봅시다.
3.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한 쌍의 핵심어는 “종과 아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