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과
동기와 배경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1:6-10약 24분 분량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1:7)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스스로를 “사도”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가 다른 서신들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는 그 깊이나 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이 사도직분에 대해서 강도 높게 언급함으로써(1:1), 사도직의 권위에 관한 문제가 서신의 중요한 주제가 될 것임을 예고해 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서신의 수신자들이나 독자들은 당연히 사도가 이 주제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갈 것으로 예상할 수 있겠으나, 예상은 빗나가고 있습니다. 사도는 대신에 ‘갈라디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고,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재정의(再定議)함으로써, 있을 수 있는 사이비 복음의 발효를 사전에 차단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이 가진 사도적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천사들의 권위까지고 참된 복음의 권위 아래 복속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의도하고 있는 이중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교회 내에 들어와 있는 “유대주의”를 차단하고, 더 나아가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한 신학과 신앙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참된 복음은 단순하고도 간단합니다. 즉 그가 전했고, 그들이 받아들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일반 명사가 아니라 마치 사람이나 장소처럼 유일무이한 대명사와 같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두 번에 걸친 저주를 쏟아낸 후, 사도는 다소 감상적이며 도전적인 질문을 불쑥 내던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질문은 두 번에 걸친 수사적 강조입니다. 요지인 즉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곧바로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서신을 쓰는 동기와 관련해서 사도의 입장은 이처럼 단호하면서도 비타협적입니다. 그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방식 또한 처음부터 감상적이며 감정적입니다. 다른 문제들을 대함에 있어 그는 포용과 관용과 인내로 일관하고 있습니다만(예“ 고전 7-14; 빌 1:15-18; 4:8-9),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처럼 분노하게 하고 있으며, 비타협적이며 비관용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문학과 역사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문안 인사에 이어 긴 감사(感謝)가 따르는 것이 상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함은...”(롬 1:8; 고전 1:4; 립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딤후 1:3; 몬 4; 엡 1:15). 이러한 감사를 통해서 사도는 수신자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또한 그들을 위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감사 속에 그는 서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서신의 주제도 감사의 글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갈라디아서>에만 이런 통상적인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 대신 “찬미”가 문안 인사를 잇고 있습니다. 이처럼 감사의 글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단호하고도 급박한 자신의 심정이 수신자들에게 강력하게 전해지게 하려는 의도 또한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서신 곳곳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로 부르는 등 그들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1:11; 3:15; 4:12, 28 31; 5:11, 13; 6:1, 18), 그들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아마 사도는 지금 나쁜 소식을 방금 들었으며, 이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한가한 “감사”(εὐχαριστϖ)가 아니라, “충격”(θαυμάζω)입니다: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절). 편지의 서론(exordium)은 이처럼 놀라움과 함께 감사를 대신하면서 시작하고 있으며, 편지의 전체적인 주제를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신의 동기와 목적은 결국 현재 처해있는 위기적 상황을 진단하는 것인데, 사도는 먼저 “내가 놀랐다”(θαυμάζω ὅτι)는 “책망”과 함께 왜 놀랐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6절상). 그리고는 “복음”을 교란하는 자들이 전하는 ‘메시지’ 즉 “다른 복음”과 차별화 시키면서(6절하), 동시에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차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의 복음; (2) 우리가 전한 복음; (3) 너희가 받은 복음(7절하-9절). 이어서 사도는 이 세 가지 기억과 상관없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과 천사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8절하);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지어다”(9절하).
마지막으로, 사도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와 관련해서 반대자들에게는 다소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서론을 마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오직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10절).
신학과 신앙
1. 책망(6절)
서신의 대부분은 “변론과 논박”으로서(1:6-4:11), 사도는 이 단락을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6절하)
보다 정확하게는 “내가 놀랐다”로 번역할 수 있는 이 구절은 법정에서 피고를 향한 검사의 논고를 연상시켜주는 수사적 표현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단순한 호기심 어린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비난과 책망을 담은 놀라움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점은 이미 수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독자들을 위한 칭찬이나 감사가 그의 인사말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덕과 불안정에 놀라움과 함께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가 이처럼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6절상)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들의 신속한 반응 때문입니다: “이같이 속히.” 사도가 전했고 그들이 받아들였던 그 복음을 이처럼 빨리 포기할 수 있는 교인들의 신속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잘못을 행함에 있어 이처럼 재빠른 교인들의 행동은 지난 날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던 신속한 배교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출 32:8); (2)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더라”(삿 2:17). <칠십인 역>은 이 두 본문에서 모두 “이처럼 속히”(οὕτως ταχέως)에 해당하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두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길”(ἡ ὁδος)은 초대 교회 당시 스스로를 ‘그리스도 인’으로 밝히면서 사용한 단어라는 사실입니다(g0d 9:2; 19:9, 23; 22:4; 24:14, 22). 이렇게 볼 때 “이처럼 속히”에서 중요한 점은 문자적인 기간이 아니라, 수사적 과장일 것입니다.
또 하나 사도를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이를 “떠나고 있다”(μετατίθημι, 메타티데미)는 사실입니다. 이 단어는 접두어 “메타”(meta)에서 보듯이 “변하다”, “타락하다”, “버리다”, “등을 돌리다”, “변절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마지막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철학에서 이 단어는 한 학파에서 다른 학파로 사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이 단어가 현재 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서신을 받을 즈음에 이미 배교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이런 점은 4:9-10나 5:2-4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관심사는 배교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즉 누구에 대한 배교인가에 있습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그들을 부르신 이”로서 문맥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점이 사도를 놀라게 하고 있는데, 경건한 유대․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나타난 수단 또는 통로는 “그리스도에 의한” 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표현은 의미상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ἐν χάριτι χριστου; by the grace of Christ)(6절); “그의 은혜를 통해서”(διὰ τής χάριτος αὐτου, through his grace)(1:15).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의 신분과 관련해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ω; in the Christ)입니다(1:22; 2:4, 17; 3:26, 28).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인사말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적어도 구원의 복음과 관련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완전히 한 인격체로 보고 있습니다.
2. 다른 복음(6절하-7절)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는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쫓고 있는 중인데, 실은 이것은 전혀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6하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7다른 복음은 없나니(6절하-7절)
이 부분은 해석상 난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이름하에 제 일 복음, 제 이 복음, 제 삼 복음 등과 같이 여러 종류의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밖에는 없으며 그 외에는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부분의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두 절에서 유사반복처럼 사용되고 있는 두 단어 때문입니다: (1) “다른(ἕτερος, 헤테로스) 복음을 따르는 것을”(6절하); (2) “다른(ἄλλος, 알로스) 복음은 없나니”(7절상). 이러한 차이가 단순히 본문 변조의 결과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드라도,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구분해 내는 것조차도 간단치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두 단어는 동의어로서, 일반적으로 “다른 종류”라는 의미보다는 “같은 종류에 속하지만 새로운 그 무엇”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다른 곳에서 이 두 단어를 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1:19; 고전 15:39-41; 고후 11:4).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두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헤테로스”는 “또 다른 종류”로서, 그리고 “알로스”는 “한 종류 내에서 다른(또는 새로운)”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바울’이 전한 것을 적어도 보충해 줄 수는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의 진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절하)
그의 요지인 즉은, 이들 반대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보충 자료이거나 또는 다른 이름의 복음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 열매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란 교회를 교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었으며, 이들은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시점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4:4; 9:13; 10:14; 빌 1:27; 살전 3:2; 살후 1:8), 이를 “하나님의 복음”과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롬 1:1-3; 15:16; 살전 2:2, 8-9; 딤전 1:11).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다른 복음의 저주(8-9절)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반대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 사이에 타협점은 없는 것일까? 두 복음은 서로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갈라디아’ 교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은 적어도 이런 식으로 확신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9절)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는 그의 반박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두 번에 걸친 “저주”가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절의 문장 형식은 가정법으로서, 첫 번째 문장에서(8절) 전제로 하고 있는 바는 이론적으로나 가능하나 그 실현 여부가 희박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관한 것이지만, 두 번째 문장에서(9절) 전제로 하고 있는 바는 보다 직접적이며 당장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짝짓기는 당시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상당히 보편적인 수사적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유사한 경우를 <신약>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 10:37-38; 13:17; 행 5:38-39; 고전 10:27-28.
사도가 이곳에서 가정법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도 ‘바울’ 자신이나 “하늘의 천사”가 다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나 현실에서는 매우 희박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을 통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진실로 중요한 것은 복음의 내용인 것이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바울’은 처음부터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한 바 있고(1:1), 이어지는 자전적인 고백을 통해서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1:11-2:14). 이점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후 10:1:12:10; 빌 3:4-21; 살전 2:1-12).
그러나 그가 사도라는 사실은 복음 그 자체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강조는 일종의 “해학”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천상(天上)의 존재들까지 끌어 들이고 있는 배경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인데, 이들 반대자들은 스스로를 ‘예루살렘’ 교회나 그 교회의 지위 높은 사도들로부터 검증과 신임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위 유명하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 대해서 ‘바울’ 자신이 보이고 있는 입장은 분명 역설 그 자체입니다(2:11-14). 사도가 인식하고 있는 바, 설교자의 권위는 복음의 권위에서 유래한 것이지 복음의 권위가 설교자의 권위대문에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복음의 내용이 세상의 권위나 신임을 받아 변질되거나 수정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저주”(ἀνάθεμα)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코이네 헬라’ 단어 “저주”(ἀνάθεμα)는 고대어 ἀνάθημα의 변형으로서, 그 의미는 둘 다 동일합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위하여 구별된 것”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구약>의 ‘헤렘’(םרח)을 이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예: 레 27:28-29; 신 7:26; 13:17; 수 6:17-18; 7:11-13, 15). ‘헤렘’을 누구든 만지거나 소유하게 되면 그 자신도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것”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만(눅 21:5), ‘바울’은 <칠십인 역>의 용례를 따라 부정적인 ‘헤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다른 예: 롬 9:3; 고전 12:3; 16:22).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사도는 이전에 그가 가르쳤던 바를 강조하기 위하여 당시 ‘헬라’ 서신의 용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고전 15:3; 고후 7:3; 13:2; 갈 5:3, 21; 살전 4:1, 6; 살후 2:5). 정확하게 언제 무슨 가르침을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아마 그가 ‘갈라디아’ 지역을 처음 방문할 당시를 의미하는 듯합니다(참고, 5:3, 21).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받게 될 저주는 필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가 강조를 위해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두 저주”는 이런 식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후자는 전자를 구체화시켜주는 방식의 연결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4. 진정한 의도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절)
이 구절은 다소 뜻밖입니다. 느닷없이 사도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이 구절의 기능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처음부터 단락(6-10절)의 일부분이었을까? 그리고 전후 문맥과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서론”에 해당하는 앞 단락(1:6-9)과 “해설”에 해당하는 새로운 단락(1:12-2:14)을 연결해 주는 전이 구절인가? 또는 용솟음치는 사도의 감정과 기분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단락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마지막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Longenecker). 사도의 분노는 8-9절에서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으며, 그러한 감정이 10절에까지 자연스럽게 이입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의 단락으로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아니면 적어도 단락의 일부로서 괄호로 묶어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가 이처럼 자신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배경에는 역시 유대주의자들의 근거 없는 주장이 깔려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도 실은 그가 교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메시지의 내용을 변질시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아첨꾼” 또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 등으로 비난하면서 당시의 수사학자(修辭學者)나 웅변가들의 반열에 놓았을 것입니다. 예컨대, “할례”의 경우, ‘바울’도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어디에선가 그에 대해서 설교도 했을 터인데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를 강요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환심과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식입니다. ‘바울’이 이런 비난에 대해서 어떻게 자신을 변론하고 있는지 그의 다른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고전 10:33; 살전 2:4-5).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반대자들을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강도 높게 비난했던 그가 이번에는 두 번에 걸쳐 대답이 필요 없는 수사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자신도 회심한 유대․기독교인으로서 유대적인 관습과 생활 방식을 존경하고 따라야 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며(고전 9:19-23),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고전 7:17-20). 그러나 “모세 율법”에 관한 한 이방 기독교인과 유대․기독교인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지역 선교 당시, “모세 율법”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조건이나 또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지, 단순히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면,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10절의 이 마지막 선언은 앞에서 던졌던 수사적 질문,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에 대한 대답이 되기도 합니다. 일견 이 선언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곳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복음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하여, 그가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곰곰이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바울의 두 발언이 갖는 일반성과 특수성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유일무이한 복음. 우리는 일반 명사와 고유 명사가 어떻게 다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온천(溫泉)하면 일반 명사로서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온천이 “부곡 온천”이 되면 전 세계적으로 부곡 외에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극히 보편타당해야 할 일반 명사도 때로는 마치 고유명사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통일”이나 “자주”와 같은 단어는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바 그대로 이겠습니다만, 이 단어가 이북 정권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될 때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통일은 “적화 통일”을 의미하게 되고, 자주는 “반미 자주”가 됩니다. “북한”이라는 이름도 정식 명칭이 “민주 인민 공화국”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민주”나 “인민”의 의미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복음”(福音)은 어떻습니까? 위에 든 예들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그 의미가 변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고유 명사가 일반 명사화 되는 방향으로 변천해 왔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한자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좋은 소식”이 됩니다. ‘헬라어’로 ‘유앙겔리론’(εὐαγγἑλιον)으로 부르는데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오늘날 이 단어의 사용처는 더욱 확대되고 보편화 되어서 거의 대부분의 좋은 소식 또는 반가운 소식에 대한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국회가 유류세(油類稅)를 삭감하는 법안을 상정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복음”의 소식입니다. 얼마 전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먹는 자궁암 치료약이 개발되어, 이제 더 이상 병원에 가서 입원하여 주사를 맞아야 하는 고통과 수고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는 분명 “복음”의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유의 “복음”은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즐겁게, 편리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유익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자, 과연 이런 것들을 “복음”의 반열에 포함시켜도 괜찮은 것입니까? “복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놓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지금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교회에 사이비 선생들, 즉 유대주의자들이 몰래 들어와서 교회를 교란시켜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복음”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그냥 일반 명사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좋은 소식이 어디 한 가지 뿐이겠느냐 이거죠. 대한민국에 온천이 여러 개가 있듯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한 복음 역시 이것저것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전에 전했던 복음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두 복음이 상호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많은 교인들이 넘어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는 말합니다. 복음은 하나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즉 고유명사화 된 “그 복음” 외는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이라는 이름을 아무데나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누군가 나를 내 이름이 아닌 다름 이름으로 부른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요즈음 중국은 가짜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먹는 음식에서부터 첨단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품에 “짝퉁”이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삼성의 휴대 전화기 ‘에니콜’의 짝퉁을 만들어 ‘에미콜’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고, 현대의 ‘투산’ 자동차의 짝퉁을 만들어 다른 이름으로 외국에 수출까지 한다고 합니다. 기가 차고, 분통이 터집니다. 도저히 그냥 묵과하고 지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도 역시 이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까? “짝퉁”을 만들어 파는 자들도 그렇지만, 너무 쉽게, 너무 신속하게 진품을 버리고 가짜에 속아 넘어가 그것을 사는 자들입니다.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견딜 수가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분노는 단순한 배신감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분노는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데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헌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복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도는 이전에 이들 교인들이 경험한 사건과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다시 한 번 복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복음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가 전한 복음”이라야 합니다(8절). 여기서 우리란 바울과 그의 선교 여행에 동행했던 일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가 받은 복음”입니다(9절).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차원이 있는데, 복음은 그 핵심이나 본질에 있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7절).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함은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으며, 이를 “하나님의 복음”과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고유명사화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적 외에 다른 것을 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된 사역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값없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 그러나 어떻게 은혜를 그저 앉아서 값없이 받을 수 있을까보냐? 우리 모두가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적어도 양식과 체면이 있는 자라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른들로부터 세배 돈 얼마를 받는데도 그냥 드러누워 받는 자가 없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야 더 일러 무엇 하랴. 이것이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복음”에다 무엇인가 더하거나 보태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과서로 치자면 일종의 색인인 셈입니다. 이들이 보태려고 하는 것은 소위 “복음의 조건”으로서, “모세의 율법”이 그것입니다. 좁게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 “할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의복이자 음식이며, 의식이자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만. 아무튼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바는 “복음”이라는 고유명사를 일반화 하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복음은 논리적이 되고 이성적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인격이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으로서,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나타나거나 일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무엇인가 나타난다면 그 이름을 달리 불러야지 “복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7절).
만일 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저주가 될 뿐입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를 주는 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하는 것이 논리이고 이성적인 자세일 것입니다만, 그렇게 하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의 대가는 저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 얼마나 역설이며 비이성적입니까? 바로 이점이 은혜의 모순인 것이지요. 어떻게 이럴 수가? 사랑은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이며, 맹목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자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는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어느 종교가, 어느 제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작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저주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도는 이점을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천사들도(심지어는 예수님 자신마저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누가 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전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에 관한 책을 쓰신 한 목사님의 그의 책에서 설교는 반드시 신학과 목회 교육을 받은 목사가 해야지 일반 비전문인이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공학도는 그저 공학에 대해서만 강의를 해야지, 철학이나, 경영이나, 다른 분야의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은 공학자보다 철학자가 더 잘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공학자라고 해서 철학 강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요는 누가 강의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강의하느냐가 문제인 셈이지요.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기뻐한다고 말했겠습니까. 왜냐하면 누가 무슨 동기로 하든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도. 사도가 이처럼 넓고 열린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그의 동기와 의도가 자신의 만족이나 유익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시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그의 삶의 목표와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슬프게 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내팽개칠 수 없습니다.
내 사역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의 권위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 기능은 무엇이며, 수사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서신의 동기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현재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본 서신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유대주의”의 신학적 주장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